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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Feb 01. 2024

리스본, 사라마구 기념관(2)

눈 먼 자들의 도시


기념관은 마치 현대미술관처럼 꾸며 놓았다. 


그의 생애를 기념할 수 있는 여러 사진과 각국 언어로 번역된 그의 책들을 연도별로 가지런히 벽에 걸어 놓았다. 그리 넓지 않은 흰색으로 칠한 공간을 소박하면서도 알차게 채워 놓았다.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된 사라마구의 팩으로 꾸민 기념관 내부


나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사라마구의 대표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를 생각했다. 비록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완전히 짐승처럼 살지 않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가.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며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엔 마침표와 쉼표 외에는 문장부호가 없다. 고유명사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배경이 되는 도시가 어디인지, 등장인물 이름이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원초적인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은유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담아냈다. 


재미있게 잘 읽히면서도 문학적으로 분석할 게 많은 은유로 가득 찬,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장편소설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극도의 공포와 혼란과 인간의 어두운 본성은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현대 사회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볼거리로 넘쳐나지만 정작 진실은 보지 못하는 눈먼 사회, 눈 뜬 소경들의 사회라는 것이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끝낸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아와 전쟁, 착취 등 우리는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집단적 파국과 함께 모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다 떠오르고 있다. 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세계를 그린 것이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지금도 기념관 앞 광장에 있는 100년 된 털가시나무 아래 머물고 있다. 유해를 화장하여 수목장(樹木葬) 한 것이다. 


나무 밑에는 그의 출세작 <수녀원의 비망록>의 마지막 구절이 묘비명처럼 적혀있다. 

‘지구에 속해 있어 별들 속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MAS NAO SUBIU PARA AS ESTRELAS SE A TERRA PERTENCIA)’

                              

사라마구 기념관 계단에서 후다닥 찍은 기념사진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기념관 안에서 대충 기념사진을 찍고는 사라마구와 작별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그의 삶을 조명해 보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 


전 세계의 많은 독자를 작품을 통해 만나면서 공감을 얻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작가로 사는 것이 과연 영화로운 면류관일까? 


그것은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천형(天刑)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전시된 많은 책과 영예로운 순간의 기록들과는 달리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의 눈빛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래도 죽음 이후까지 오래 기억되는 글을 쓰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것을 넘어 만날 수 없는 미래 세대와 교감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부지런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예정된 심포지엄 장소로 서둘러 출발했다. 하지만 버스가 움직이질 못했다. 비가 오는 데다가 퇴근 시간까지 맞물려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저녁 8시부터 심포지엄을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도착하였다.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3시간 넘게 걸렸다. 


심포지엄은 내일 아침으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 국경을 넘어와서 많은 곳을 보고 돌아다니느라 유난히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계속)       

사라마구 기념관에 전시된 중요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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