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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Feb 03. 2024

해외 한국 문학 심포지엄

세계 문학 속의 한국문학의 위상

5부지런히 심포지엄 마치고 세비야로     



원래 빡빡하게 짠 일정에다 심포지엄까지 더하게 되니 새벽부터 바삐 서두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방을 다 싸서 내려다 놓고, 아침 식사와 회의용으로 마련된 공간에서 식사 후에 곧바로 심포지엄을 시작하였다.          

권남희 수필분과회장, 김호운 문협이사장, 강정화 문협부이사장(왼쪽부터)

     

 <제28회 해외 한국문학 심포지엄>의 주제는 ‘세계 속의 한국문학의 위상’이다.


김호운 이사장은 ‘한국문학의 세계 속 외연 확장에 따르는 문제점’이란 제목으로 기조 발제를 하였다. 


흔히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이미 세계 속의 국가가 된 우리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세계 문학 속의 한국문학의 위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무엇보다 먼저 세계 여러 나라 문학 속에서 한국문학이 독자층을 많이 확보하는 게 선행과제다. 


해외 진출을 위한 번역 사업과 관련 행사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자는 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문학인 개개인의 창작 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창작환경을 조성하고 개선해야 한다. 


진지하게 심포지엄에 참여하는 문협 회원들


국내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원고료 지급, 발표 지면 확대, 출판 환경 개선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작가는 글을 쓰고, 정부는 저작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 문학은 작가 개인의 창조물이지만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아야만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자면 독자에게 널리 읽히는 작품을 쓰는 것이 우리 작가들에게 주어진 선행과제다.             

      

열심히 경청하는 문협 회원들


주제 발표 1은 강정화 부이사장이 맡은 ‘세계 문학 속의 한국문학의 위상’, 주제 발표 2는 권남희 수필분과회장의 ‘K-컬처와 동반성장 과정에서 한국문학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여행 일정에 쫓기는지라 미리 준비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충분히 토론할 여유가 없었다. 각자 자료를 읽어보고 버스 안에서, 혹은 식사하는 시간에 자유롭고 편안하게 주제 토론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서로 모르던 작가들이 문학이란 매개체를 통해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 아닌가.      




리스본에서 세비야까지 가려면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이자 항구도시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세계 3대 성당으로 꼽히는 세비야 대성당으로 갔다. 


세비야 대성당(Sevilla Cathedral)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일 뿐만 아니라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건축물이다. 세비야 성당의 상징인 히랄다 탑은 12세기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 족이 만들었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었던 것을 헐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다가 16세기에 와서야 첨탑 꼭대기의 돔을 떼어내고 기독교 방식의 종루를 설치했다. 


세비야 대성당 외관


1402년부터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된 성당 건물은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된 만큼 고딕·신고딕·르네상스 양식이 고루 섞여 있다. 


이곳에는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은 산 페르난도 왕을 비롯하여 에스파냐 중세기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남쪽 문 근처에는 콜럼버스의 묘가 있는데, 보통 무덤과는 달리 에스파냐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의복을 차려입은 조각상이 관을 어깨 위에 메고 있는 형상이다. 이 관 속에 콜럼버스 유골 조각이 안치되어 있다.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 묘지


1492년은 스페인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해였다.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인 그라나다 왕국을 마침내 탈환하여 오랜 스페인 국토회복 전쟁(Reconquista)에 종지부를 찍은 해였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완전히 몰아내고 성전 꼭대기에 다시 가톨릭 십자가를 올리게 되었다. 


또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러 호기롭게 떠난 해도 1492년도였다. 


이사벨은 배포가 큰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다. 당시 이사벨은 40세, 콜럼버스는 39세였다. 


무모한 몽상가의 엉뚱한 이야기라고 다들 외면했던 콜럼버스의 계획을 그녀는 지지하였고, 막대한 항해 자금도 대주었다. 그저 연회를 두어 번 할 경비에 불과한 액수라고 말하며 거액을 선뜻 내놓았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뱃길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에 닿을 것이라는 콜럼버스의 허황한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과감한 투자는 스페인의 역사를 바꾸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이사벨 여왕 덕분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 사건은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만드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계속)


공중에 떠 있는 콜럼버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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