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호 독거 부인

by 서쪽하늘


연탄이 와 산책을 나갔다. 6월 말에 이사 온 후 아직 아는 이웃이 없다. 여느 날처럼 사람들은 연탄 이를 보며 예쁘다 귀엽다 말하며 스쳐갔다. 딱 그만큼이었다. 자세히 물어보며 다가오지도 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지하주차장 환풍기 위에 혼자 앉아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탄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신기하다며 관심을 보였다. '연탄'이라고 이름을 말해주니 웃으며 좋아했다. 처음으로 약간의 대화를 나눴다. 그래봐야 몇 분 되지 않았지만.





다음 날 같은 자리에 할머니는 앉아있었다.
"연탄이 왔냐. 연탄아."
이름을 기억했고 다정히 불렀다. 이번엔 좀 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자에 할머니들 많던데 왜 여기 계시냐 물었더니 시끄러워서 싫다고 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궁금했다. 누구와 살고 계시는 걸까.




다음날 냉장고를 열어보니 분홍빛 복숭아가 하나 있었다. 주머니 속에 불룩하게 집어넣고는 연탄이 와 나왔다. 이번엔 좀 더 긴 대화를 나눴다.
"누구랑 사세요?"
"혼자 살아요. 독거 부인이에요."
부끄러운 듯 말씀하셨다.
혼자 살고 계셨구나. 약간 어색해져서 나는 말했다. 친구는 가족들에게 치여서 빨리 혼자 살고 싶어 한다고. 말해놓고 보니 이건 아닌가 싶었다.
공통점이 있었다. 여주가 고향이어서 내가 살았던 경기광주를 잘 알았다.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과 같은 절의 납골당에 계셨다.
새벽에 몇 시간 공공근로를 하고 한 달에 29만 원 정도 번다고 했다. 자식이 둘 있는데 결혼 한 딸은 연천에, 나이 오십인데 미혼인 아들은 일산에 산단다. 아들이 결혼하는 걸 보고 죽어얄 텐데 하며 자기 죽으면 아들이 고아가 된다고 했더니 아들이 웃었다고 했다. 그러면 세상에 죄다 고아일 거라며. 할머니 말에 나도 웃었지만 그 마음 알 것도 같았다. 할머니께 전화번호를 여쭤봐서 '403 호 최 OO 어르신'이라고 저장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 날엔 종일 뭐 하고 지내실까 드문 드문 생각이 났다.

사람하고 친해지면 푹 빠져버리는 편이라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비 그친 어제 403호 벨을 눌렀다. 마침 날이 좋아 대청소를 막 마쳤다는 할머니는 러닝차림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 혹시라도 심란하게 살고 계실까 걱정했는데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작정하고 앉아서 긴 이야기를 나눴다. 앞 동에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했다. 왜 친구가 딱 한 명이냐고 물었더니 울먹이시며 다 죽었다고 하셨다.
해방되던 날 어르신의 할아버지께서 동네잔치에 가신다고 해서 따라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했다. 전쟁 때는 여주에서 음성까지 피난을 갔는데 밥을 소금에 찍어먹으며 살았다고 했다.
마트에서 사 온 복숭아 두 개와 파리바게뜨에서 산 단팥빵을 드렸다. 물냉면도 드셔보시라고 드렸다. 놀라며 사양하시더니 잘 먹겠다고 어떻게 먹는 건지 자세히 물어보셨다.
나는 박카스를 하나 얻어 마셨다. 전기검침이나 소독하는 분들 그 외 누구나 오면 주려고 항상 한 박스씩 사놓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같은 동 옆 라인이다. 난 1402호 할머니는 403호? 내가 사랑하는 초록숲을 할머니도 좋아하신다며 자주 베란다에 나가서 앉아계신다고 했다.
하루가 길고 심심하시냐 물었더니 워낙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계속 움직인다고 하셨다. 해가 질 무렵이면 밖으로 나와서 같은 곳에 잠시 앉아있다 들어가신단다.




어차피 이어질 운명이었을지도. 연탄 이를 어차피 기억하고 이뻐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셨을 테니. 난 또 그 '다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니. 친구는 오늘도 사부작사부작 집안일을 하고 틈날 때면 베란다 의자에 앉아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나처럼 행복하겠지. 친구가 생겼다. 내 친구는 87세의 독거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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