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친구들
2015년 5월 20일, 한국에서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동네는 낯설 만큼 고요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유모차 행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잠시 멈춘 듯 낯설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바로 옆에 있어 우리 아이들 또래도 많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날은 조용함만 흘렀다.
집 정리를 마친 오후, 메르스 확산 소식을 들었을 때 이사를 마쳐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스쳤다.
아이들은 각자 장난감을 살피고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지만, 당분간은 조심해야 했다.
새로 주문한 소파는 도착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덕분에 거실은 텅 비어, 평소 느껴보지 못한 단출한 공간이 되었다.
세 살과 여섯 살, 두 딸은 서로의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걸 듣고 까르르 웃었다. 빈 벽은 곧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낯선 집, 낯선 병, 두려움 속에서도 베란다를 확장한 거실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집안을 가득 채웠다.
빈 벽을 보고 생각났던 걸까? 아이들은 책장에서 그림자 놀이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했다.
에르베르 튈레의 색색깔깔 44권의 책 중《그림자 놀이》 책은 구멍을 내어 만든 여러 장의 동물 삽화 덕분에 글자가 없어도 읽는 이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놀이 도구 같은 책이다.
외부와 단절되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진 아이들의 답답함과 외로움을 그림자 친구들이 채워주었다. 특히, 신랑의 구연동화는 당시 인기짱 번개맨을 능가할 정도로 실감났다. “아우 우우, 우르릉 쾅!” 늑대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재빨리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늑대가 우리 집에 왔대요!"라고 외쳤다. 어느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내가 용감한 기사다! 늑대를 물리치겠다!" 손가락은 칼이 되었다.
그림자 늑대와 용감한 기사들이 맞붙으며, 벽은 금세 활기찬 모험의 숲으로 변해갔다.
“둥, 둥, 뿌우우우~~!” 코끼리가 걸어왔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벽에서 쿵쿵 뛰어나올 것만 같다. 몸을 맞대고 그림자에 숨죽이던 아이들은 놀라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없었던 벽에 등장한 동물들은 아이들의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외출이 조심스러워 놀이터와 공원 산책은 잠시 미뤘다. 우리는 집 안에 머물렀지만, 빈 공간은 울창한 숲이 되어 동물 친구들과 숲속 탐험을 할 수 있게 했다.
푸른 바닷속 깊이 들어가 형형색색의 물고기와 산호 사이를 누비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익살스러운 원숭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야생 고양이들과 함께 저마다 자기 별자리 찾기도 했다.
가장 인기 있는 그림자 친구인 손가락은 아이들의 반응에 따라 여러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메르스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었던 시절, 우리 집 빈 벽은 상상력의 캔버스가 되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함께 놀고, 웃고, 다투고,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림자 친구들은 아이들의 답답함을 해소해 주고, 부모의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어쩌면 오늘 밤에도, 빈 벽 너머에서 그림자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