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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Apr 02. 2023

달이 찾아준 꿈



  붉게, 노랗게 물들었던 낙엽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거리마다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티브이에선 ‘꽃샘추위’라는 단어를 반복해 읊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외투와 목도리, 장갑 따위를 챙기기에 바빴다.

  이불속 깊이 파고드는 오한에 절로 눈이 떠졌다. 등을 덥히는 전기장판을 켜지 않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전기세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 차마 장판이나 보일러 등을 켤 수는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수업까진 약 한 시간이 남았다. 그래도 추위에 못 이겨 몸을 더 웅크렸다간 다시 잠에 들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이불을 들춰내자 몸의 떨림이 더 빨라진 듯했다.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한 번 숨을 내뱉을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문득 오늘은 가지 말까, 란 생각이 들었지만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학점 하나하나에 신중해야만 했다. 괴상한 비명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우두득,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난 기분이었다. 아직 창밖에 해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나의 아침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한들, 쏟아지는 하품을 참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양 볼을 잡아당기기도, 커피를 홀짝이기도 했지만 눈꺼풀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흰머리가 잔뜩 난 저 남자가 칠판에 쓴 글씨를 가리키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건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건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대충 성적에 맞춰서 온 문예창작은 이제 취업은커녕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대나 음대 등의 다른 예술대학들도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여 복수전공을 하거나 전과를 선택하곤 했다. 당연한 일이다. 저 캄캄한 밤하늘 위에 희미했던 달빛 한 점 내려오지 않았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달이 불러온 결과는 이 바닥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노래 스트리밍 앱 차트는 몇 년째 변동 하나 없었고 영화는 물론 드라마 작가들도 더 이상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좋은 책이 출판되지 않는 동시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읽거나 보려고도 하지 않으니 서점이나 영화관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나는 간판에 불이 꺼진 서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살갗에 와닿는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달을 바라보는 것. 무엇을 한다고 한들 영감을 받는 시점을 대부분이 비슷했다. 해가 산 능선 주변을 기웃거리면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도, 도로를 밝히는 상가들의 전등도 꺼진 이 거리는 달빛의 부재를 확실하게 체감시켜 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옆에는 과잠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두꺼운 전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최대한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한껏 들뜬 그들의 목소리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뚫고 귓가를 맴돌았다.

  “그거 알아? 이번에 달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았다는데? “

  “야, 오 년이 넘도록 나온 말이야. 그런데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 있었어? 나는 안 믿어. “

  사실 그동안 별별 의견들이 사람들을 혼란에 몰아넣었다. 지구의 자전이 멈췄다던가, 달이 유성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던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리 하나 없이 지껄이는 말들과 뉴스에서 전하는 보도와 연구원들이 공식으로 전하는 정보 등을 구분하지 못해 저마다 내뱉는 말이 달랐다.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래. 이거 봐바.”

  스마트폰을 들이미는 그녀의 손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진이 곧장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조금 더 가까이 내밀어 기사 사진을 보았다. 달이 지구를 바라보는 거리, 그 사이엔 새카맣게 떠오른 검은 막이 있었다. 지구의 자전과 달의 공전 주기로 인해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확신하게 된 건 딱 달이 지구를 바라보는 그 앞에만 그 막이 존재했다.

  “기사도 연구원이랑 직속으로 연결된 신문사야. 오늘 오전에 막 나온 기사라 아직까지 반박자료가 나오진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이유가 될 것 같아. “

  그녀가 말을 마치지 마자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그들의 말을 더 듣고 싶었지만 둘은 버스 번호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드를 단말기에 찍으면서도 연신 여학생들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자리에 앉고서는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검색했다. 정말 그녀가 말 한대로 방금 본 사진이 뉴스 보드 맨 윗줄에 떠올라 있었다. 기사를 눌러듣지 못했던 본문을 천천히 읊어보았다.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달. 우리 연구원들은 그 원인을 찾으려 수가지 연구를 해왔다. 위성사진만으론 도저히 원인을 찾을 수 없던 우리는 지난 8월, 선발된 유한월 연구원 달 탐사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달 착륙에 성공하고 보낸 사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이 막을 이루어 지구와 달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이 물질은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달의 공전을 따라 움직였기에 그동안 우리가 달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주변 위성을 흡수하진 않았기에 블랙홀로 추정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 연구소는 유한월 연구원이 보내주는 자료들을 토대로 끊임없이 이 물질이 무엇인지,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낼 것이다. ’


  거대한 사진에 비해 짧은 글이었지만 밑에는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이 가설 또한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 많았던 댓글은 신이나 종교 따위를 논하며 인간의 잘못을 운운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 탄 사람들도 고개를 숙여 기사를 들여다보거나 이를 주제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닫고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당장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아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보았다.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었기에 온갖 상가들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가마다 지붕에 태양열 발전기가 붙어져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전기세를 대신해 태양열을 쓰는 가구가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텅 빈 밤하늘이 더욱이 체감되는 듯했다.

  갑자기 차 한 대가 버스 앞을 끼어들어 급정거를 했다. 내 머리는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창문에 들이박혔다. 적나라한 쿵, 소리에 승객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교통약자석 바로 앞에 앉은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독서하는 사람일까. 나는 머리에 느껴지는 통증도 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어싱을 한 귀에는 에어팟 따위 끼워져있지 않았고 사람들이 손목에 흔히 차는 애플 워치 또한 없이 뽀얀 살만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하차벨을 누르기 전까지 스마트폰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당장 버스를 등지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연신 피어오르는 그녀를 향한 질문들이 맴돌았다. 무슨 책을 읽으세요? 달 소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출간된 책인가요? 이후에 나온 책이라면 무슨 재미로 읽는 건가요? 그러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손이 쉽게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가 들어가는 골목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얼굴에 미소가 한껏 피어올랐다. 버스 안에서 소설을 읽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다는 게, 아직까지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으로 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해가 저물고 어두워진 방 안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채워졌다. 형광등을 켜지 않아 노트북 불빛만이 방을 밝혔다. 어서 노트북에 연결된 충전 선을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남은 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승전결, 발상과 구성, 두드러지는 묘사… 낮에 글을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음에도 소재가 떠오르지 않는 고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이마를 짚었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박아도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였다. 이번엔 잔뜩 굽은 허리가 쑤셔왔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쭉 곧추세웠다. 우두득,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자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몸을 눕히고 싶은 욕구가 가득 채워졌다.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찬 바람을 좀 맞으면 잠이 깨겠지. 곧장 의자에 걸쳐놓은 겉옷을 입었다. 밤이 되면 엘리베이터 운행을 멈추었기에 계단으로 내려갔다. 발소리가 울리자 계단과 가까운 집에서는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났다. 공통 현관이 열리면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아직까지 밤이 되면 숨을 쉴 때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피어올랐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산책을 얼마나 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그냥 막다른 길이 나오면 왔던 길을 돌아가고, 갈림길이 나오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몸을 돌리면 됐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가로등도, 가정집의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길은 눈살을 찌푸려야만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서서히 주변을 하나둘씩 인식해 갔다. 좁은 골목이었지만 상가마다 간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불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더욱이 눈살을 찌푸리는 듯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있었다. 한껏 전등이 켜진 거리는 바닥에 떨어진 온갖 쓰레기까지 비추었고 북적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떠드는 소리, 음악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비록 좁은 길이었지만 귀에 이어폰을 꽂아도 음악소리가 묻혀버리곤 했다. 볼륨을 키우고 고개를 더 높게 들면 노란 달빛을 볼 수 있었다. 가로등이나 전등이 나오기 전엔 분명 저 빛에만 의지해 사람들이 거리를 거느렸겠지.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흔히 믿었던 ‘달 소멸설’이 아닌 무언가가 가리고 있는 거라니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하릴없이 걷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은 낯설기만 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려 고개를 돌렸지만 한껏 잠겼던 망상 탓에 행적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선 큰길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에 횡단보도가 있는 걸 보니 저기로 가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그곳으로 향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상가 하나가 보였다.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지만 그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가게 위 간판을 읽어보았다. 유메노 혼… 그때, 갑자기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종량제 봉투를 들쳐 매고 나왔다. 깜짝 놀란 나머지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몸을 옆으로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여자의 시선이 뒤통수를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장을 진하게 고쳤어도 알 수 있는 얼굴과 귀에 달린 피어싱. 낮에 버스에서 본 여자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이내 전봇대 아래에 쓰레기봉투를 내려놓았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나서야 경직되었던 몸이 움직였다.

  “잠시만요.”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표정에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무턱대고 내뱉은 말이었기에 그다음 이을 말도 생각하지 않았다.

  “네? ”

  내가 볼멘소리밖에 내질 않자 점차 그녀의 표정이 굳어갔다.

  “아까 버스에서 뵀었는데 무슨 책 읽고 계시던 거예요? ”

  말을 건네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기껏 뱉은 말이 이것이라는 게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도 멋쩍은 듯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실…… 제가 글을 쓰거든요. 달이 없어지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확연하게 줄었잖아요. 그래서 신기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제서 여자는 아, 하고 끄덕였다. 경계를 풀었는지 날카로워진 눈빛도 초승달을 연상케 하는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글을 쓰는 분이시라면 우리 가게 한 번 와보실래요? ”

  “지금 해가 저물었는데…”

  “꼭 낮에만 장사를 하라고 법이 개정된 건 아니잖아요.”

  찰나의 순간동안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 거리만큼 암담한 과제였다. 과제를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한다면 당장 내일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내일 수업의 유무였다. 시간표를 떠올려 보았을 때 당장 내일 수업은 없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한들 무언가가 더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 가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 없는 테이블 앞에는 알록달록한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잔들이 매달려 있었고 사방은 온통 촛불로 밝혀져 있었다. 테이블마다 하나, 바에 셋, 진열대 위에 둘. 그런데 총 열여섯 개의 촛불이 놓인 곳이 있었다. 그녀는 가장 밝은 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곳이 서재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손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온갖 책들이 달이 사라지기 전과 후 장르, 작가, 가나다 순으로 가지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웬만한 헌 책방보다도 다양했다. 그래도 사건 후로 나열된 책은 전으로 구분된 책 보다 눈에 띄게 비교가 될 정도로 적었다.

  “요즘 서재들이 다 문을 닫아서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다 구하신 거예요? ”

  “사장님께서 구하신 거라 저도 잘 몰라요. 제가 읽는 책도 여기에 있는 책이었어요. “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러곤 바에 들어가 버스에서 본 책을 꺼내 들었다.

  “사실 사건 후에 나온 책이라 유명한 작가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냥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재밌더라고요. 오히려 감동도 없고 문체도 딱딱한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녀가 손에 쥔 책은 한정호 작가의 ‘달을 찾아서’라는 소설이었다. 대충 사건이 일어난 뒤 급격하게 전기세가 급격하게 오른 현실을 풍자하는 소설이었는데 평론가들 사이에선 흔히 졸작, 망작이라고 비난만 받았다. 한정호 작가는 그 소설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했다. 사실상 그가 마지막 풍자 소설 작가라고 불려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비난을 본 작가들은 모두 SF나 영어덜트로 주제를 바꾸어 책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만큼 폭이 좁아지고 사람은 많아져 피 튀기는 경쟁을 해야만 했고 경쟁에 지친 작가들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소설은 감감무소식으로 두었다.

 

  가게 안은 나와 그녀밖에 없었기에 바 앞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 촛대가 타고 있었기에 겉옷을 천천히 벗었다.

  “술 어떤 거 드세요? 원하시면 서재에서 책 있으니 독서를 하시면서 마시셔도 괜찮아요.”

  그녀가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사실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바에 들어왔으니 한 잔 정도는 마시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그러나 메뉴판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아도 내가 아는 술이 단 하나도 없었다. 기껏 마셔본 거라곤 소주와 맥주, 막걸리뿐인 나에게 칵테일이라곤 소맥밖에 없다.

  “그냥 도수 낮고 달달한 걸로 주세요. “

  그녀는 검지를 턱에 가져다 대고 볼멘소리를 내더니 중지와 검지를 튕겨 딱, 소리를 내었다.  

  “그럼 작가님한테 가장 어울리는 걸로 한 잔 드릴게요.”

  “아아… 아직 작가님이란 말은…”

  말을 못 들은 건지 무시를 한 건지 대답 없이 등을 돌려 술병을 골라냈다. 잇따라 퓨어러를 낀 병과 셰이커 사이를 멀리 떨어트려 술을 따랐다. 또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음료들을 넣고 화려하게 셰이커를 흔들었다. 괜히 박수를 쳐야 할까 손이 움찔거렸다.

  “시그니처는 아닌데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도수도 그렇게 안 높아요.”

  잔 안을 가득 채운 액체는 독이 든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알록달록했다. 위에 얹어진 우산은 마치 휴양지 바다를 연상케 했다. 빨대로 칵테일을 한 번 빨아들이자 달짝지근한 맛이 혀에 맴돌았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알코올의 향이 오히려 단맛을 더 강하게 만드는 듯했다. 칵테일을 삼키고 안에 든 잔향을 만끽하려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책 읽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

  드디어 낮부터 일렁이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잔을 닦던 손수건을 내려놓고 팔을 바에 기대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권씩은 읽게 하셨어요. 늘 억지로 책을 읽다 보니까 아무리 재밌는 책을 읽어도 흥미가 안 생기더라고요. 적나라한 묘사, 오글거리는 문체, 말도 안 되는 발상. 그런데 또 평론가들은 그게 좋다고 칭찬을 했지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론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생겨 독후감 종이를 늘 여백으로 내버려 둘 수 있게 되었죠. 첫 자유를 만끽했달까? 그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교과서 말고는 책을 펴보기조차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달이 사라지고, 문학계가 무너지니까 오히려 최근 소설들이 더 흥미롭더라고요. 엉성한 구성, 어색한 묘사, 너무 현실적인 발상들. 가끔은 옛날에 자주 보던 형식이 그립긴 하지만 최근에 나온 것들이 너무 새롭다 보니 자꾸 손에 잡히게 되네요. “

  촛농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술이 담긴 잔에도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서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분명 과거의 서적은 손때가 타 표지가 너덜너덜했지만 최근의 서적은 눈에 띄게 깨끗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지만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을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거죠. 사장님은 그런 취지로 이런 가게를 만든 게 아닐까요.”

  그녀가 다시 잔을 집어 들고 입을 대는 부위를 문질렀다.

  “이름을 여쭈어보아도 괜찮을까요?”

  “선월입니다.”

  “저는 서일이라고 합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

  잔에 남은 모든 술을 비워냈다. 당장 노트북 앞에 앉으면 어떤 글이라도 써질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달빛 하나 골목에 닿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전기세는 전등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혀끝을 맴도는 알코올의 쌉싸름함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어디까지가 내가 겪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백일몽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몽상에 빠진 듯해 실없는 웃음을 히죽거리며 발자취를 남겼다.

  

  *4736251. 제목은 그냥 이렇게 짓기로 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평범하기에 어떤 것과도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참을 수 없이 평범한 제목. 무색무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들을 펜촉 끝에서 천천히 적어 내리면 새하얗던 종이가 금세 까맣게 물들었다. 특별하지 않기에 더 특별한 씨알메리들이 누군가에게 눈부신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저 날 실없이 웃게 만들었다.

  “꼭 별처럼 빛나야만 할까요? 오히려 빛나지 않기에 멍하니 바라볼 수 있잖아요. “

  사람의 손때가 잔뜩 타버린 책도, 서점마다 있는 베스트셀러 칸에 놓인 책도, 선월이 손에 쥔 이름 모를 책도, 심지어 백서일이란 내 이름 석자가 새겨진 책도 어쩌면 사라져 버린 저 달보다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4736251: 현대 재즈에서 자주 사용되는 코드


  “아니야. 오른쪽으로 밝은 달이 그믐달이야. “

  “아니야, 바보야. 그건 초승달이야.”

  “바보는 너지.”

  “에휴, 됐다. 어차피 뜨지도 않는 달 이름을 알아서 뭘 해. “

  수업시간, 내 앞에 앉은 학생들의 대화였다. 한 편으론 안타까웠지만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믐달이라고 합니다.”

  쓸모없는 참견이었다. 그럼에도 근질거리는 입은 결국 방정을 떨어 버리고 말았다. 두 학생도 이름 모를 사람이 대화에 끼어든 게 불편했는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나도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필통 안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펜을 연신 돌리는 것 말고는 이 정적을 깰 방법을 도무지 찾지를 못했다.

  옛날엔 분명 강의실에 태블릿 PC나 랩탑 따위를 꺼내놓고 수업을 필기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종이 노트와 볼펜을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시대가 흐를수록 과거에 수렴된다는 건 아이러니했지만 인간의 퇴화라고 여겼다.

  “열등하다는 것과 우등하다는 것의 기준이 뭘까요? 본래 생물학자들은 구조가 복잡하고 스스로 여러 물질대사를 할 수 있다면 우등한 생물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견해가 갈리기 시작했죠. 예를 들어봅시다. 혼자서 자료 조사와 PPT 제작, 심지어 발표까지 전부 다 하는 학생과 조원들이 만든 과제에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쏙 넣는 학생. 둘의 점수가 같다면 누가 더 우등한 걸까요?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전자의 학생? 효율적으로 점수를 받은 후자의 학생? 이제는 그 기준이 굉장히 애매모호해졌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논문을 쓰거나 읽으면서 본인의 확실한 견해를 가지는 게 좋겠죠?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PPT 슬라이드에 검은 화면이 나타남과 동시에 책가방 열리는 소리와 의자를 집어넣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앞에서 대화를 나눈 학생들도 한껏 미소를 띠며 강의실을 나섰다. 분명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이 났지만 이상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밤을 새웠음에도 하품 한 번 나오질 않았다. 커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오히려 후련하게 비워진 가슴이 기분을 들뜨게 만든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창밖을 바라보다 가방에서 어제 쓴 글을 꺼냈다. 4736251. 제목부터 천천히 글을 읊어 내렸다. 늘 내가 쓴 원고에 만족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엔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어색한 몇 문장들을 빼는 퇴고를 마친 후 그 자리에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과제 제출이 끝났다. 가방을 올려 매고 정류장까지 향하는 길. 문득 머릿속에 선월이 있던 바가 연신 맴돌았다. 오늘 저녁에도 그곳으로 가야지. 충동적인 계획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충동은 가끔 새로운 배경을 내게 선물하니까.

  해는 저물었지만 여전히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에 잠깐 동안 깜빡이는 가로등만이 삭막한 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일부로 밝은 큰길로 걸음을 옮겼다. 따듯하진 않았지만 절로 느껴지는 포근함에 일부로 보폭을 줄였다. 그녀가 있는 바와 떨어진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더욱이 이 설렘을 만끽하고 싶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새하얀 옷을 입은 선월이 뒤에 서 있었다.

  “아, 과제를 모두 끝내서……”

  “충분히 행복한 일이네요. “

  “이제 출근하시는 겁니까? ”

  “네. 원래 목요일은 아홉 시에 오픈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좀 빨리 가고 싶더라고요.”

  “영광이네요. 거기로 가는 길이었는데.”

  발 보폭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가게까지 남은 길이 더 짧게 느껴졌다. 4736251. 평소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참을 수 없이 평범한 길임에도 살갗에 와닿는 특별함은 내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서일 씨는 왜 글을 쓰세요? ”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물어볼 법한 한없이 평범한 질문. 그럼 난 볼멘소리를 내며 평범하지 않을 대답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설을 쓰면 내가 주인공이자 조물주가 된 듯한 기분이거든요. 그거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원고지를 끄적거리고 있더라고요.”

  “꼭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늘 우리의 밤을 밝히던 달도 본래 스스로 빛나지 않는 그저 거뭇하기만 한 위성인걸요. 그럼에도 묵묵하게 캄캄한 밤을 밝게 비추어주었죠. 본인의 역할이 뚜렷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

  평범했던 대답에 그렇지 않은 답변이었다. 어쩌면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무뎌져버린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저 의미 없이 위스키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도 내 무안함을 느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촛불로 간신히 주변을 밝히는 공간 안에 눈부시게 빛나는 화면 사이로 오늘 기사가 엿보였다. 그 안에는 며칠 전에 버스에서 본 그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알 수 없는 큰 가림막이 지구와 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진. 그나저나 저 가림막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왔고 왜 갑자기 그 사이를 가리는 것일까. 연신 피어오르는 질문에 쉽사리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았다. 내가 의문을 가진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 또한 없었다. 나보다 훨씬 더 유능한 사람들이 그 원인을 밝혀내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겠지. 한없이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것 외엔 뚜렷한 내 역할을 해내는 것.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인 사이로 보이는 두 남녀는 이미 술을 한 잔 마시고 왔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둘은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감탄사를 아끼질 않았다. 서재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자 선월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마치 술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메뉴를 하나씩 읊으며 여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메뉴판보단 가지런하게 진열된 서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냥 오빠 먹는 거랑 똑같은 걸로 먹을게. 나오는 동안 우리 책 구경할래? “

  남자는 손을 살짝 들고 선월에게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서재 앞으로 가 뒷짐을 지고 연신 주변을 훑었다.

  “옛날에는 재밌는 소설들이 참 많았는데… 어? 내가 좋아했던 작가 소설집이다! ”

  그들의 대화를 엿듣자니 무언가 가슴 한편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들의 말 끝마다 끊임없이 묻어 나오는 과거형 탓일까. 아니면 요즘 나오는 것들이 모두 전에 나온 소설이나 영화 등을 재현해서 만들기 때문일까.

  “나 이 작가 사인회도 다녀왔잖아. “

  “맞아, 전에 네가 얘기했던 거 기억난다.”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 앞으로도 이런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까? ”

  “적어도… 우리가 죽기 전에는 오겠지. “

  기약 없는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도, 감정도 모두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소모시켰다. 그걸 감안하고도 기다림을 택한다는 건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아니,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들의 말을 완전히 헤아릴 순 없었다. 그러나 멋쩍지만 조금은 진지한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다.

  찰나의 떨림. 그것은 가게 안에 걸려있던 몇 개의 잔들을 깨트렸고 절로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 싸매게 했다. 떨림이 멈추고 나서야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수라장이란 단어가 적절한 상황이었다. 나도, 선월도, 두 연인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머리에서 손을 뗐다. 혹시 두 번째 떨림이 일까 우리는 자세를 낮추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도 두 번째 떨림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제서 선월은 창고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깨진 유리잔을 쓸어 담았다. 약간 올랐던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유리 밟으시면 위험하니 잠시만 물러나 계세요. ”

  선월이 빗자루질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그녀를 향해 다가가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와 두 연인은 넘어진 테이블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를 도왔다. 그때,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살짝 열린 창문은 커튼을 휘날렸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우리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시간엔 가로등 하나 켜지 않는데 도대체 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까. 아무리 얕고 희미하더라도 이 빛의 근원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달빛이다. 곧장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보았다. 바람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게 해 실눈으로 간신히 바라본 하늘 위엔 아주 작게, 달의 조각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빛이 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혹시 제가 꿈을 꾸는 걸까요? ”

  “그런 것 같기도 해요. ”

  선월도 빗자루질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는 데 일조했다.  바람이 눈을 건조하게 했다. 그럼에도 잠시라도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멈춤과 동시에 월식이 일 듯 달의 조각은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선월의 얼굴로 돌렸을 때, 이미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반대쪽에 두 연인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눈이 찔려서일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약 없던 기다림의 순간이 오늘일 줄은 몰랐다.

  “오늘은 서둘러 집에 가 쉬어야겠네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만 마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뉴스를 보고 싶었다. 혹시나 이게 꿈이 아닌지.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걸 보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떠들썩해도, 고요에 잠겨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설령 내가 꿈을 꾼다 한들 이 기분을 천천히, 오래오래 만끽하고 싶으니까.

  꿈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켠 뉴스 기사는 모두 같은 사진을 떠올리며 오 년 만에 달이 등장했다고 떠들고 있었다. 연구원 말에 따르면 아직 이게 어떤 현상으로 인해 일어난 건지 전 인력을 동원해 원인을 밝히고 있는 중이라 했다. 이상하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정말 모두가 같은 걸 보았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행복한 걸까. 그제야 오늘 선월의 연락처를 받아낸다는 다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무엇 때문인지 뭐가 됐든 괜찮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의 새로고침 버튼을 연신 누르는데 방금 새로운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지금껏 올라온 사진과는 다른 사진을 들고 있었기에 절로 엄지가 그 기사로 향했다. 그런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음이 느껴져 혀를 한 번 날름거렸다.

  ‘불현듯 사라진 가림막. 다시 달이 떠오르려나? ’

  기사 안에는 위성으로 찍은 동영상이 하나 걸려 있었다. 동영상을 재생시키니 지구와 달 사이를 가로막던 검은 물체가 흔들리더니 금이가 조각이 깨져 나갔다. 아마 순간의 지진과 바람은 그 탓에 일어난 듯했다. 머지않아 깨진 가림막은 다시 복구가 되었지만 인류가 희망을 갖기엔 충분한 시발점이 되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이걸로 끝이 났다. 이젠 우리가 움직일 차례다. 다시 음원 차트가 뒤바뀌고, 베스트셀러 칸에 놓이는 책이 늘어나고,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오늘부터 천천히 하루하루를 기록하면서 내 변화를, 하늘의 변화를 일일이 모두 기록하기로. 오늘 쓴 일기를 모두 적고 책갈피를 그다음 장에 끼워 넣었다. 앞으로도 모든 일기는 이렇게 쓰기로 했다. 마침내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 지금까지 적은 일기장을 펼쳐보기로 하며. 눈을 감아도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았다. 설렘은 불수의근인 심장을 쉴 틈 없이 흔들어 잠 못 이루게 하는데 나는 또 그 감정을 곧대로 느끼고 싶어 몸에 힘을 풀어버리니, 그게 내 불면의 원인인 듯했다.

  한껏 무거워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을 땐, 이미 햇빛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음악 스트리밍 앱으로 들어가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노래들을 재생시켰다. 그런데 재생한 노래의 도입부가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무리 음원 차트를 순위대로 틀었다고 한들 몇 년째 음원이 바뀌는 일이 없었는데…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재생되는 노래의 제목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제목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곡 정보를 보는데 발매 일자가 오늘 아침이라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 노래는 오늘 아침에 발매가 되고 오후가 되기까지 빠르게 순위가 올라 실시간 음원 차트 1위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와 가슴을 흠뻑 적시는 가사는 노래가 끝이 나고도 다시 듣기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곧장 유튜브에 들어가 노래 제목과 가수를 검색했다. 아직 뮤직 비디오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꾸준히 올린 기타 연주 영상과 노래 영상들의 조회수가 극적으로 높게 올라와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 아침에 음원이 발매되고 찍은 인터뷰 영상이 있었다. 이 영상은 실시간 급상승 영상에도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놓질 못하고 이어 그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가수 백일몽입니다. 우선, 그냥 사람들이 이런 노래들을 안 들을 걸 알면서도 꾸준히 노래를 했어요. 점점 구성이 엉성해지고 음도 단순해져서 올렸다 내렸다 한 영상만 아마 수 백개가 될 거예요. 제가 듣고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노래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럼에도 노래하는 걸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오늘 발매한 건 며칠 전부터 도무지 듣기 거북하다고 생각해 올려야 할까 고민한 노래였어요. 몇 번의 수정을 거쳐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폐기를 해야 할까 했는데 어젯밤, 불현듯 떠오른 달을 보게 되었죠. 찰나도 안 되었지만 그 순간에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요. 다시 하늘이 캄캄해지고 곧장 녹음실로 들어가 마음이 가는 대로 그 노래를 녹음했어요. 그리고 완성된 노래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올린 수 백 개의 노래들과 맞먹는 노래가 제 귀에 박히게 되었죠. 마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린 저 자신에게 고생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듯한 느낌. 그래서 당장 발매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상 미뤘다간 또 고민하다 폐기를 해버릴 것 같아. 이런 제 노래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그녀의 말처럼 밤을 지새운 것 같아 눈 밑에 거뭇한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잠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득 정신이 돌아오고 책상에 올려둔 일기장을 펼쳐 이 일을 끄적였다. 그녀의 노래는 그녀에게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듯한 손길인 동시에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탄이다. 일기장을 덮자마자 노트북 화면을 켰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어제 그 찰나의 순간을 떠올렸다. 온몸을 감싸는 듯한 이 몽환적인 기분은 곧장 내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서 춤추게 했다. 평범한 듯싶으면서도 특별한, 나의 이야기. 나도 그녀처럼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니 더욱이 춤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서일 씨도 따라가느라 정신없겠네요.”

  선월이 빈 잔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서둘러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정말 왜 갑자기 무언가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걸까요? ”

  그러게. 정말 왜일까. 무엇이 무엇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한들 이런 영악한 짓을 할 인물로 느껴지진 않았다. 자연 현상이라고 하기에도 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신도, 자연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저는 어쩌면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런 짓을 한다고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집단이 뭐가 있는데요? ”

  “설마 하나도 없다곤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냥 단순한 제 추측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괜히 잔 안에 든 얼음을 빙글빙글 돌렸다가 남은 술을 모두 입으로 털어 넣었다. 달달함 뒤에 느껴지는 쌉쌀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한껏 올라오는 알딸딸함에 그녀의 말을 지울 수 있었다. 다음 마실 칵테일을 고르려 메뉴판을 읽는데 벌컥, 하고 가게 문이 열렸다. 전에 보았던 두 연인이었다. 여자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둘은 따로 놓인 테이블이 아닌 선월을 앞에서 볼 수 있는 바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외투 맡겨드릴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마티니 딱 한 잔만 마시고 나갈 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마티니 두 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바로 향하는 선월에게서 시선을 떼질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연신 혀를 날름거렸다.

  그들 앞에 잔이 놓이자 남자는 외투 안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녀를 향해 명함을 건넸다.

  “한국전력공사 직원입니다. 다름이 아닌 그냥 여기 분위기가 너무 좋아 앞으로도 자주 올 것 같아서 드리는 겁니다. “

  친절한 말투 안에 가시가 돋친 듯 여전히 그의 미간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도 여전했다. 선월은 명함을 받아 빤히 종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표정에 나도 모르게 혀를 날름거렸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주세요.”

  선월이 멋쩍게 웃고 나서야 남자는 술잔을 털어 넣었다. 옆에 같이 온 여자도 남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샷잔을 털어 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여자의 손을 잡고 가게 밖을 나섰다. 묘한 분위기에 선월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들이 먹고 간 잔을 설거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선월 씨가 무엇을 하는지 여쭙질 못 했네요.”

  정적을 깨트리려 뇌를 거치지 않고 무작정 말을 뱉었다. 내가 뱉고도 달아오르는 민망함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냥… 지금은 보시다시피 바텐더를 하고 있죠? ”

  단순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였지만 일렁이는 질문들을 턱 끝에서 삼켜냈다. 시간을 돌이켜 뻔한 질문을 내던진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일 씨, 머지않아 모든 게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써주세요. 모두를 위해.”

  “네.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백일몽의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노래가 끝나면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반복재생 시켰다. 반복으로 노래를 재생시키는 버튼을 눌러도 됐지만 이렇게 일일이 버튼을 눌러 노래를 되감았다. 이것 또한 습관이었다. 어쩌면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유튜브나 광고 매체 등에서 쉴 틈 없이 떠들었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나왔으나 흥행에 실패하며 하나둘씩 영화를 접는 감독들이 늘어났는데 이번 영화는 예고편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사전 예매 또한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매진되었다. 간신히 티켓 두 장을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한 장은 오늘 바에 가 선월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고 말을 할 계획이었다. 해가 저물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이상하게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동안 나는 영화 예고편을 반복해 시청하거나 출연진 등을 검색하는 것으로 하릴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감독의 정보에 그가 여태 만든 작품들이 길게 나열되었다. 그중에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실패한 작품도 여럿 있었는데 불현듯 한 포스터에 시선이 팍 꽂혔다. 나는 절로 그 영화 제목을 검색해 포스터를 크게 확대했다. 조금은 흐릿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진하게 화장한 저 얼굴, 선월의 얼굴이다. 출연진 정보에 들어가 등장인물을 보니 문선월이란 이름과 사진이 떠올랐다. 주연의 역할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많은 씬들에 그녀가 담겼지만 흥행에 실패함으로 큰 관심을 받진 못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출연작은 그 영화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기사들의 댓글도 처음엔 그녀의 정보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 버렸다. 그녀의 행방을 찾는 기사도 3년 전에 쓰인 게 가장 최근 기사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법한 질문들이 연신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이들을 없애려 스마트폰 화면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되감기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은 딱 한 시간이었다. 밤눈이 어두운 사람이나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도 일부로 그 시간에 집을 나와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목적지 없는 산책 끝에 도착한 곳은 선월이 있는 바였다. 오늘은 일찍이 가게 안에 촛불이 켜져 있는 듯 환하게 빛나 있었다. 창문으로 가게를 살짝 엿보니 아직까지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오롯이 바 자리에 서 있는 선월이 무언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엔 창문과 벽은 한참 두껍기만 했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주머니 안에 고이 접어 넣어둔 티켓을 꺼냈다. 피어오르는 질문들은 모두 집어넣고 오늘은 영화를 보러 가자는 말만 건네는 거다. 반대편 손을 꽉 쥐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가게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선월은 고개를 숙이며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선월 씨가 추천해 주는 걸로 마실게요. “

  “음… 아직 오픈 준비가 덜 되었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

  “물론이죠.”

  곧장 영화를 보러 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바닥을 닦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낮에 본 포스터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머릿속의 지우개를 가져올 수단으로 서재 안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제목도, 작가도 보지 않고 무작정 꺼낸 책이었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이네요. 저도 그 소설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

  “아.”

  짧은 탄식이 나온 건 불수의적이었다.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녀를 향해 시선을 기웃거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 대충 마쳤어요. 추천을 받으실 때 오늘의 기분을 말씀해 주시면 더 좋은데. 그것에 맞게 제가 술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약 삼십 분의 시간이 흐르기까지 고작 첫 문장만 읽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나는 멍하니 그 문장들을 중얼거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 기분이요? 글쎄요. 굉장히 설렘이 가득했다가 와르르, 무너진 기분이랄까요.”

  “네. 그 느낌을 담아 드릴게요. “

  다음 문장을 읽는 대신 첫 문장을 곱씹었다. <모순>이 어떤 내용이었더라. 분명 읽은 기억은 있지만 모든 내용이 일일이 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때 그 소설을 정말 좋아했고 모순이란 단어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아무리 강렬했어도 잊혀진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티켓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손에선 종이 냄새가 베어 퀴퀴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내 앞에 잔이 놓이고 티켓을 그녀에게 건네려는 찰나, 며칠 전 명함을 준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뒤에는 경찰 두 명이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저희랑 얘기를 좀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와 주시죠.”

  경찰 한 명이 종이 한 장을 보이며 선월을 향해 다가왔다. 선월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손인사를 건넸다.

  “그 술은 그냥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다 드시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녀가 사라지고 한국전력공사 직원인 남자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유감입니다. 친구 하나를 잃으시겠네요.”

  재빨리 영화 티켓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도 감이라는 게 있다.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한 그를 보고 잇따라 들릴 말이 조금은 예상이 되었다.

  “문선월. 그 여자가 원래 배우였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나요? ”

  “네. 오늘 낮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본인이 하던 걸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표현은 늘 어긋나곤 하잖아요. 어떻게든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월이 없는 가게는 처음이다. 촛불 타오르는 소리만이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타오르는 건 촛불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영화 티켓을 연신 어루만졌다. 아직 밤은 깊지 않았고 아직 나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옆에 얹어둔 책을 펼쳤다. 그녀가 만들어준 잔을 기울이며 책을 읊으니 무언가 술술 읽히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잔에 담긴 얼음이 모두 녹아 달콤했던 술이 어느새 밋밋한 맛을 냈다. 다음 페이지를 펼치려는데 종이 한 장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언뜻 보이는 종이 안에는 작은 글씨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불현듯 피어오른 호기심에 종이를 펼쳐 읽어보았다. 선월이 쓴 듯한 글이었다.



  그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그렇게 잘못된 걸까. 행복하고 싶다는 누구나 원할 법한 소망이 그렇게 잘못된 걸까. 나는 그냥 행복하고 싶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명예를 쌓아 올리는 것도 아닌 그냥 소박한 행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도무지 내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내 꿈이 곧 내 행복이었기에. 파렴치한 일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온갖 손가락들이 비아냥거리며 나를 향해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나 같이 인맥도, 돈도 없는 배우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인간이 감독의 눈에 들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진 않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오디션을 지원하고 코피를 흘려가며 연습하고 점수도 높은 점수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이번 조연을 맡게 되는 건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나, 그는 조연마저도 유명한 명품 조연 배우를 섭외해 곧장 촬영에 들어갔다. 그녀는 오디션에 참가하지도, 주어진 대본을 연습하지도 않았다. 불공평했다. 그럼 지금까지 꼬박 새우며 보낸 내 밤들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걸까. 그날 밤, 술을 진탕 마시고 산에 올랐다. 쪼그려 앉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래를 보며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을 모두 터뜨렸다. 잔뜩 오른 술기운 탓일까, 당장 여기서 뛰어내려도 고통 하나 없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조금씩 앞으로 향하는데 밤구름이 개고 환한 달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달이는구나, 하고 질끈 눈을 감았는데 문득, 모든 이야기들이 저 달에서부터 시작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달이 없어진다면…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 스토리가 짜이지도, 원활한 촬영이 진행되지도 않지 않을까. 당장 저 달을 부수기엔 그 파편 조각들이 이곳까지 떨어져 재앙이 생길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저 달을 없앨 수 있을까. 아예 그 사이를 막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분명 술에 취했었지만 온갖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구의 자전속도, 공전속도, 달의 자전속도 모두를 고려해 가장 최적화된 방법으로 그 사이를 막는 것. 곧장 집으로 돌아가 그 방법을 몇 달 동안이나 고민했다. 끝내 도달한 결론은 우주를 돌아다니는 우주 쓰레기와 먼지 등을 모아 가림막을 만드는 것. 그리고 속도에 맞춰 움직일 수 있게 그 쓰레기들을 연료로 태우는 이동수단을 다는 것이었다. 나는 설계도를 가지고 FEPS로 갔다. 불법 전력 기관이었지만 그들의 기술력은 충분히 믿을 만했으니.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기세가 폭등하게 될 건 예상한 일이었다. 그럼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폭등한 전기를 대신해 합법이 아니더라도 값이 더 싼 전기를 찾을 테니 그 기업에서도 충분히 이윤이 될 거라 말을 하니 그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하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 영향이 영화 시장뿐만이 아닌 모든 시장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들었던 음악도, 비가 오늘날 창가에 앉아 읽었던 소설도 모두 퇴화되어 그대로 멈추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장이 멈춤과 동시에 사람들의 문화생활의 격도 점차 낮아진 것 또한 함께 따라온 결과였다. 그렇기에 간신히 한 영화의 조연 자리를 연기할 수 있었지만 감독이 커리어에 넣기도 부끄러운 영화가 되어버렸다. 아마 모든 게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게 나 때문이다. 그러나 되돌리기엔 관할은 이미 FEPS의 손에 담겨있다.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늘 곁에 두어 행복하고 싶은 게 전부였다.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삭막한 하늘 아래에서도 작가들이 그 전과 똑같이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돌려내야 한다.



  <모순> 그 단어는 아름다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모순이 가져온 딜레마에 끝없이 질문을 던져 꼬리의 꼬리를 물다 보면 참값에 수렴하게 되니까. 어쩌면 선월은 꼬리를 물다가 다른 방향의 값으로 수렴하게 된 게 아닐까.

  다음날 아침, 뉴스는 온통 선월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조사 중이라는 제목이 그녀를 감싸주고 있었지만 댓글은 온통 선월을 비난하는 말들만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선월이 쓴 종이를 경찰에게 넘겼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손차양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봐. 오늘 밤은 개기월식이 있을 거래. “

  “정말? 오늘은 하늘만 바라봐야겠네.”

  버스 앞자리에 앉은 두 학생의 대화를 엿듣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내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 대중교통이나 쉬는 시간에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읽는 중이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도 분명 이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이 정류장에서 내렸었지. 정말 긴 시간 동안 달이 사라졌었지만 그 사실은 금세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말았다. 아무리 강렬했어도 잊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잊혀진 건 사건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온통 비난을 내뱉었던 선월도 함께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가끔은 그녀가 보고 싶어지곤 했다. 끄적였던 일기장을 펼쳐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끄적여도 그녀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고 허리를 들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스크롤을 연신 위로 올려 쓰지 못 한 제목으로 화면을 끌어올렸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선월. 나는 그냥 그녀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행복해하지 않을까? 본인의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손가락을 다시 키보드 위에 올렸다.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참을 수 없이 평범하지만 특별한. 너를 위한 제목. <달이 찾아준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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