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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Mar 24. 2023

백일몽이 만든 레모네이드



  이런, 당신을 오늘 티브이에서 보고 말았어요. 당신은 나를 무의식적으로 어지럽게 만들어요. 이 감정은 제게 자연스러워요. 티브이에서 정말 아름답게 보여요. 혹시 내가 보이나요? 내가 보이면 손을 한 번만 흔들어줄 수 있을까요?

  중독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내 삶을 마치 영화처럼 만들어주거든요. 언젠가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줄 날을 매일 꿈꾸고 있어요. 당신은 날 숨을 쉬게 만들어요. 당신은 날 살아가게 만들어요. 당신은 날…… 존재하게 하는 레몬 같아요.


  새하얬다. 온통 새하얗게 물든 이 공간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팔을 휘적거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그럼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만 괜찮다. 이 공허를 만끽하다 보면 언젠가 눈을 뜰 테고, 그럼 다시 천장이 보일 것이다. 분명 그럴 거다. 분명……

  이런 꿈을 꾸게 된 지 어엿 한 달이 흘렀다. 눈을 뜨면 마치 물에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닭살이 돋는 그 기분이 싫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쉽사리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꿈쩍도 않는 다리를 들어보았다. 절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몸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번엔 허리를 들어 올렸다. 우두득,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티브이로 시야가 내려왔다. 몽롱했던 정신이 점점 깨어나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껏 찌그러진 캔맥주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저분한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피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티브이가 켜져 있는 걸 보니 술을 잔뜩 먹다 잠에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시계는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슬리는 째깍 소리에 스마트폰을 들어 음악을 틀었다. 어쩌면 음악을 트는 것이 나의 아침 일과일 수 있었다. 적어도 노래를 틀거나 티브이를 틀어놓으면 혼자가 아닌 것 같았으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둘, 셋, 넷… 화면이 바뀔수록 점점 머릿수가 늘어났고 그 얼굴엔 모두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럼 나도 그들을 따라 웃음을 지어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호탕한 웃음을 짓는진 모르지만 적어도 저 미소를 띤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문득 옆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한껏 입꼬리를 올렸지만 축 처진 눈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그냥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그냥 우스꽝스러워서 터져버린 진짜 웃음.


  서랍 안에 놓인 거라곤 라면 두 봉지와 햄 통조림 하나, 참치 통조림 하나가 전부였다. 이번엔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지난달에 엄마가 보내준 김치, 물. 야채 칸이나 달걀을 놓는 칸은 텅 비어있었다. 그나마 칸을 가득 채운 건 초록 빛깔의 캔맥주뿐이었다. 이번에 터져버린 웃음은 왜 나온 걸까. 김치를 꺼내 냉장고 문을 닫고 다시 서랍을 열어 햄 통조림을 꺼냈다. 뚜껑을 따면 밀가루가 잔뜩 들어가 분홍 빛깔을 띠는 햄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났다. 칼이 아닌 숟가락으로 햄을 잘라내어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햄이 익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느 정도 햄이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밥을 퍼올려 그 위에 햄과 김치를 올린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밥을 연신 비빈다. 설거지를 할 그릇이 최소화되면서 빠르게 밥을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예전엔 혼자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게 지긋지긋했는데 무언가 지금은 소리가 잇따라 들리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그릇을 들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 드디어 실없이 웃음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이 카메라에 잡혔다. 당신이 웃었다. 나도 당신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이건 분명 행복해서 짓는 웃음이야. 크게 밥을 한 숟갈 떠올려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당신은 손차양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번에도 당신을 따라 물을 마셨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죠? “

  대답 없을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당신은 나를 말을 할 수 있게 하니까.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오늘처럼 쉬는 날이 참 싫었는데. 차라리 몸이라도 힘들면 이 좆같은 기분을 못 느끼니까.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난 뒤로 늘 이 날만 기다려요. 내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꺼낼 수 있는 이 순간을.

  “점심은 뭐 드셨어요? 저는 보시다시피 이런 걸 먹어요.”

  “돈 벌기 힘들지 않으세요?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웃는 게 정말 힘든 일인데…”

  당신이 마이크를 쥐었다. 예능 MC들은 노래를 한 곡 불러달라며 무대 위에 당신을 세웠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꽉 쥔 당신은 그저 아름다웠다.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조금 더 키웠다.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밥알갱이를 씹던 턱의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노래 가사가 화면 왼쪽 아래에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가사를 읊는 당신의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무릎을 껴안았다. 안는다는 건 참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게 사람이던, 인형이던, 베개던. 광고가 나오거나 당신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끝나면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잠식시켰으니. 그다음 당신이 나오는 프로그램 재방송까지 두 시간 남짓이 남았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를 꺼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집 안은 캄캄했으니 밤이나 다름없지. 그런데 이러다 잠에 들면 어떡하지. 그럼 또 새하얗게 펼쳐진 공간에 덩그러니 떨어져 방황하게 될 텐데. 혹시라도 당신과 미주알고주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면 조금은 이 배경이 알록달록 칠해질까요.

  어제 먹다 담은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댑혀 접시 위에 담아냈다. 피자는 나누어 먹으라고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는데 결국 혼자 이 피자 한 판을 다 먹네요. 피자 한 조각을 빼놓아 다른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가 두 개니 또 누군가와 함께 피자를 먹는 기분이었다. 정말 죽고 싶은데. 당신이 나를 살린 것 같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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