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어쩌면 도피자란 이름이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그 공통점은 우리를 만나게 했고 헤어지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은…… 결국 변하지 않을 거였다.
세실리아는 도쿄 여행 중에 만난 스페인 사람이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을 여행 중이었고 그 첫 번째로 도착한 국가가 도쿄였던 것이다. 생각보다 마음이 잘 맞았던 우리는 남은 여행을 같이 보내보기로 했다. 지금은 호주를 거쳐 베트남과 필리핀을 지나 싱가포르에 정착 중이다. 다음 향할 국가를 정하지 않았을뿐더러 돈도 부족해져 잠시 이곳 싱가포르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만 했다. 이 여행이 끝나는 순간, 나와 세실리아도 끝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여행객임에도 잠시 일거리를 준다는 말에 우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자는 우리를 한 시장에 데려가더니 허름한 천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골동품 가게인데 한 일주일만 가게를 맡아주시면 됩니다. 판매 수익은 15프로.”
가게는 시장 구석 한편에 박혀있어 사람들의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을 법했고 천막 절반이 노출되어 비가 내린다면 꼼짝도 못 하고 홀딱 젖을 게 뻔해 보였다. 나는 손바닥을 펼친 관계자를 뒤로하고 브이자를 펼쳐 보였다.
“15프로는 너무한 것 같습니다. 20프로로 해주십시오.”
“은혜가 있는데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18프로.”
“17프로. 그 이상은 안 됩니다. “
그제야 관계자는 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해주었다. 영어를 못하는 세실리아는 뒤에서 돌멩이를 발로 차며 내가 뒤를 도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됐나 보네? ”
“응. 여기서 판 금액의 17프로를 받기로 했어. 그런데 골동품들이 그렇게 비싼 것들이 아니라 좀 열심히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걱정 마. 나 샤넬에서 일했었잖아.”
“이건 샤넬이 아니고 골동품인데? ”
세실리아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치켜세웠다. 그러곤 구석에 놓인 솔을 집고 골동품 위에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털기 시작했다.
“일단 보기에 예뻐야 사람들이 사든지 말든지 하지. 이렇게 먼지만 잔뜩 쌓여있으면 거들떠도 안 볼걸.”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여분의 솔은 보이지 않아 세실리아가 솔질을 한 골동품을 옷소매로 박박 문질렀다. 조금씩 광택이 보이자 진열대가 그럴싸하게 보였다.
가지런하게 진열대를 정리했지만 시장 구석에 위치한 탓에 사람들은 우리 천막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길목에 덩그러니 놓인 전봇대처럼. 한껏 자신감을 가졌던 세실리아도 싱가포르 언어는 커녕 영어조차 할 줄 몰라 의자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이러다간 비행기값은 커녕 밥값도 벌지 못 할 거란 예상이 들었다.
“정오……“
세실리아가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중천에 떠오른 해, 조금은 잦아든 발걸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손님은 없을 것 같은데 여기 자리 좀 보고 있을래? 뭐라도 사 올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먹을 거를 사 온다는 핑계로 시장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적어도 다른 상인들은 어떻게 물건을 파는지, 어떤 물건을 파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
시장은 주로 열대 과일이나 싸구려 옷들로 늘어져 있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불교 용품 가게가 보이곤 했는데 우리처럼 골동품만 파는 가게는 없어 보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도 열대 과일 상점이나 싸구려 옷가게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경쟁자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옷 원단을 만져보거나 과일향을 들이마시는 내 모습을 보면 전통 시장의 매력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결국 점심거리로 바나나를 하나 샀다. 모양이 망가지고 절반은 검게 물들어 상인이 팔지 못한다는 걸 더 싼 값에 달라고 졸라 받은 바나나였다. 나는 세실리아에게 향하면서 검게 물든 바나나만 똑 따내 허겁지겁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구석에 어느덧 가까워지자 멀리서 세실리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명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세실리아가 벌떡 일어나 한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그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실리아와 더 가까워지자 그녀의 손에 쥐인 현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옆에서 다가오는 나를 보고 손에 쥔 현금을 흔들어 자랑했다.
“어떤 걸 판 거야? ”
“그냥 쇠 팔찌.”
“이걸 사가는 사람도 있구나……”
“유심히 쳐다보길래 이것저것 물어봤지. 마침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알더라고? ”
“뭐라고 했길래 저걸 두 개나 사간 거야? 심지어 5달러씩이나 주고? “
세실리아가 멋쩍게 웃음을 보이더니 내 품에 안긴 바나나를 하나 뜯어 껍질을 벗겼다. 배가 고팠는지 한 입에 바나나 절반을 배어 물었다.
“그냥 살 수밖에 없도록 해야지. “
그녀가 입 안에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리곤 아직 삼키지도 않았으면서 남은 절반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저 남자 스마트폰 뒤에 딸처럼 보이는 여자의 증명사진이 끼워져 있었어. 그래서 슬쩍 혼자 사냐고 물어봤지.”
“증명사진이랑 혼자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
“기러기 아빠라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여 다음 말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서로 이 팔찌를 끼고 있다면 그날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 딸 것까지 두 개를 사가더라고. “
“맙소사. 그건 거짓말이잖아. “
“아니, 적어도 오늘 저 남자의 꿈에는 자기 딸이 나올 거야. 이 팔찌가 그 그리움을 더 깊게 파준 거고.”
차마 그 말에 답변을 할 수 없어 혀만 할짝거렸다. 그녀가 어쩌다 샤넬 매장에서 해고되었는지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정오, 어차피 우린 일주일만 여기 있을 거고, 적어도 우린 거짓말로 이 싸구려 골동품을 파는 게 아니야. 그저 이 골동품으로 내면에 무언가를 더 끌어올리는 거지.”
세실리아가 두 번째 바나나 껍질을 벗겨냈다. 그래,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녀의 방식이 맞을지도 몰라.
점심시간이 지나가자 다시 시장이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나와 세실리아는 이 기회에 골동품을 하나라도 더 팔자는 마음으로 번갈아 밖으로 나와 호객행위를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팔찌 두 개가 일주일의 매출 전부일 것 같다는 불안이 들었으니 자존심 따위 내려놓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표현을 잘하는 세실리아는 영어를 할 줄 모르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나는 표현을 할 줄 몰랐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되지도 않았다.
30분가량 지나자 세실리아가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정오, 그냥 가게를 비우자.”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우린 여기 돈을 벌러 왔는데.”
“아니, 가게에 우리가 있으면 물건을 자세히 보고 싶어도 꼭 사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잖아. 혹시라도 누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면 그때 우리가 말을 걸면 되고, 가게 근처에 손님이 없으면 우리가 같이 호객행위를 하는 거지. 내가 하는 말을 네가 번역하면 되니까. “
그녀의 말은 곧 도박을 하자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전제를 뒤로하고. 내키진 않았지만 더 좋은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 안이 훤히 보이게 천막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우리 둘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아는 골동품 가게의 슬로건을 추억을 파는 가게로 정하자고 했다. 낡은 물건인 만큼 다양한 경로로 추억이 떠오를 수 있다나 뭐라나. 나는 그저 그녀의 말대로 추억을 사가라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그런데 정말로 추억을 살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짚신 인형은 어릴 적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인형과 정말 똑같이 생겼군요. 하나 사가고 싶어요.”
“낡은 시집의 종이냄새가 시인을 꿈꾸던 제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네요. 얼마인가요? ”
우리는 관계자가 말했던 가격에 조금 더 보태서 값을 불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비싼 것 같다는 불평 하나 늘어놓지 않았다. 우리가 호객을 하러 자리를 비울 때도 먼저 다가와 물건을 계산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밤이 되고 시장이 문을 닫자 관계자가 정산을 하러 찾아왔다. 그는 순식간에 사라진 진열대와 잔뜩 쌓인 돈 상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더 들여놓아야겠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건 약속한 수당입니다. “
남자가 꾸깃꾸깃한 현금을 봉투에 넣지도 않고 건넸다. 덕분에 적나라하게 액수가 드러나 보였다. 매출에 비해 순이익이 너무 적다. 더 팔아야 다음 여행지의 비행기값을 보탤 수 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일렁이는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걱정 마요. 내일부터 3일 동안 지역 축제가 있으니 아마 사람은 많을 겁니다.”
그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손에 땀이 멎도록 하진 않았다. 세실리아도 마찬가지인지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숙소로 돌아가고 나와 세실리아는 하루의 마무리였던 섹스조차 하지 않고 어떻게 골동품을 팔지 얘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관계자의 말대로 시장이 아직 열지도 않았음에도 근처가 잔뜩 붐볐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게로 들어서니 이미 관계자가 다른 가게에서 더 가져왔다는 골동품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앞으로 3일 동안은 이럴 겁니다. 오가는 길이 복잡해도 조금만 양해해 줘요. “
아직 시장이 열리기까지 한 시간이 남았지만 입구가 워낙 혼잡한 탓에 일찍 문이 열렸다. 나와 세실리아는 급하게 골동품을 솔질하며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을 힐긋거렸다.
“아, 어지간하면 3일 동안 금은 받지 말아요. 환전도 힘들고 처리도 힘드니까.”
관계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금값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걸로 남자의 말을 떨쳐냈다. 어제처럼 가게를 비우고 세실리아와 함께 길목으로 나왔다. 받은 상품들은 어제보다 더 낡고 볼품없었지만 세실리아의 말이면 이번에도 거뜬히 팔아넘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우리 가게 앞 길목은 한적했다. 결국 나는 세실리아를 뒤로하고 시장 앞으로 더 나아가 인파를 확인했다. 시장 안은 아까 문 앞에 바글거리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가게 불빛만이 시장 안을 메꾸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간판이 아래로 길게 늘어진 줄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려가며 글씨를 읽으려고 했지만 영어도, 중국어도, 말레이어도, 타밀어도 아닌 글에 읽는 걸 포기하고 더 가까이 천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막은 보랏빛으로 치밀하게 사방을 가리고 있어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천막 밖으로 나오는 사람마다 손바닥만 한 금덩어리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장난감은 또 아닌 것 같고. 나는 방금 나온 사람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는 과일가게 앞에 발걸음을 멈추더니 망고스틴을 하나 쥐어 들었다. 그리곤 달러 대신 금 일부를 상인에게 건넸다. 3일간 열리는 장에서 쓸 수 있는 환전소인가. 그럼 왜 관계자는 저걸 받지 말라고 한 걸까. 온갖 질문들이 입 안을 헤집었지만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억지로 집어넣었다.
“추억을 팝니다. 추억을 고이고이 간직하지 말고, 틈틈이 꺼내 읽어요.”
어제와 같이 호객행위를 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마침 세실리아가 한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니 어제 세실리아에게서 팔찌를 사간 남자였다. 그런데 그는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금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지만 그 사이 있어야 할 팔찌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딸은 잘 만났나요? ”
그의 손목에 팔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세실리아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딸이요? 제게 딸이 있나요? 저는 아내 말고는 가족 따위 없습니다.”
그가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세실리아의 몸은 잠시 굳었다가 멋쩍게 웃으며 다시 움직였다.
“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세실리아를 지나치더니 이내 우리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계시나요? ”
세실리아가 남자가 공허하게 내리꽂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는 암모나이트 목걸이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암모나이트로 뭘 하셨었나요? ”
“아뇨. 아닌가, 분명 무언가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남자는 문지르던 암모나이트를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가 등을 보이자 세실리아는 아쉽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때, 그가 다시 암모나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금조각을 진열대 위에 올렸다.
“팁이라고 생각하세요. 굳이 물건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가 사라지자 세실리아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금조각을 펼쳐 보였다. 나도 호기심에 금조각을 만져보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확실한 건 금은 아니었다. 세게 누르면 바스락 부러질 것 같았고 금처럼 광택이 나지도 않았다.
“세실리아, 이건 뭘까? 여기서 돈처럼 쓰이는 것 같은데.”
“그러게. 나중에 돈으로 환전을 해주려나? ”
”그렇겠지? 그런데 아까 관계자님이 웬만하면 이런 거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
말을 마치자마자 세실리아가 손바닥에 코를 들이밀어 냄새를 맡았다.
“뭐 하는 거야.”
“맛을 볼 순 없잖아. 그런데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나. 마치 과자 같아.”
“당연히 먹는 건 아니게…”
세실리아가 덥석 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서 빼내려고 그녀의 얼굴을 잡았지만 갑작스레 주저앉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그만큼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래. 세실리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
“정오, 저 남자 딸이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
“몰라. 그걸 먹자마자 한 여자가 팍, 하고 떠올랐어. 그리고 분명 직감할 수 있었어. 내 머릿속에 나타난 여자가 저 남자의 딸이라는 걸. “
“그런데 오늘 저 남자는 딸은 없고 아내만 있다고 했잖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어. “
”저 사람이 알츠하이머는 아닐 테고 그럼 어떻게 하루 만에 자기 딸의 존재를 잊어? “
“죽었거든.”
“어? ”
“이것도 몰라. 그 과자를 먹자마자 떠오른 거야. 건널목에서 달려드는 차에 치이는 장면, 바닥이 여자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장면, 여자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 전부.”
조금 앞으로 나와 근처 가게들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조각 덩어리를 움켜쥐고 물건을 사고 있었고, 상인들은 그걸 받아 상자에 넣어두었다. 왼쪽 코너 가게 상인은 세실리아처럼 조각을 덥석 베어 물기까지 했다. 그런데 세실리아와는 다르게 묘하게 행복해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음 가게를 찾아온 사람의 옆구리에도 조각 덩어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그 조각으로 구매가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떴지만 그다음 찾아온 사람마저 현금이 아닌 조각으로 물건을 사겠다고 했다.
“저게 도대체 뭐길래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걸까.”
세실리아는 내 질문을 듣고 한참 동안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손뼉을 치더니 가까이 내게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끼니를 해결해야만 하잖아. 즉, 어차피 현금을 소비해야 되는 건데 만약 저게 현금보다 싼 값에 물건이나 음식을 살 수 있다면 충분히 우리도 환전을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절약하는 선에서 말이야.”
그녀의 기막힌 잔머리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어차피 소비될 거, 의심을 할 필요 따위 없었다.
“그럼 혹시 모르니 내가 먼저 가볼게. 세실리아는 가게를 지키고 있을래? ”
“아니야. 내가 가볼게. 나는 영어를 못하지만 너는 할 수 있잖아. 어제 했던 것처럼만 말하면 돼. 하지만 영어는 하루사이에 늘진 않으니까 내가 가는 게 나을 거야.”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줄을 기다리는 동안 현금으로 골동품을 사간 사람은 고작 둘이었다. 그것도 내가 현금을 강요했고 그들도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통한 방법이었다. 마침내 세실리아가 손바닥만 한 조각을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그 정도 크기에 얼마 썼어?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값어치를 해? ”
”돈은 한 푼도 안 썼어. “
“그럼 뭐로 환전한 건데? ”
“기억.”
잠깐 몸이 멈칫했다. 문득 예전에 여행 인터넷 카페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매년 싱가포르 시장에 추분이 오면 기억과 화폐를 환전하는 환전소가 열린다고. 처음 그 글을 봤을 땐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고 여겼는데 정말로 사람들이 기억을 환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글에서 말하기론 대부분 여행객들은 주로 기억하지 못하는 0세에서 3세의 기억과 화폐를 바꾼다. 화폐의 가치는 겉보기엔 잘 모르나 행복하거나 좋았던 기억이면 손바닥 크기여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나쁘거나 잊고 싶은 기억이면 손바닥 크기라도 음식 하나 먹을까 말까 한 가치라고 했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세 살까지 기억을 바꿨어. 거기서 말하기로 충분히 사람들이 한 번쯤은 궁금해하는 기억이니 오늘 하루는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래.”
나는 세실리아가 가져온 조각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분명 남자가 건네주었던 조각과는 달리 조금 더 튼튼한 게 느껴졌다.
“너무 걱정하진 마. 이걸 먹으면 다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니까.”
“그럼 일부만 쓰고 다시 먹으면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
“음… 본인이 먹는 건 안 된대. 대신 다른 사람이 먹으면 기억의 일부만 돌아온다고 하더라고? ”
“그럴 수 있겠네. 그럼 혹시 모르니까 그건 아껴 쓰도록 하자.”
“일단 배가 고프니까 이걸로 뭐라도 사 먹을래? 우리 아침도 못 먹었잖아.”
거절을 하기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결국 가게 근처에 위치한 식당에서 닭고기 덮밥을 시켰다. 세실리아의 기억을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허겁지겁 덮밥을 먹는 모습이 거울에 비치어지자 나도 모르게 손이 멈추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걸까.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 남자의 이름은 쥰지라고 했다. 중국인이지만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덕분에 기본적인 회화는 가뿐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조각 대신 현금을 건네며 옥으로 된 찻잔을 달라고 했다. 나는 덥석 그가 내민 현금을 받아들였지만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왜 과자가 아닌 현금으로 계산을 하세요? ”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쥰지는 이미 볼멘소리를 내며 뱉어낼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두 분 모두 여기가 처음이시군요. “
세실리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잇따라 그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일주일 동안 다음 여행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도 떠벌리고 말았다. 쥰지는 의자 위에 올려둔 세실리아의 기억 조각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시장이 열리면 아이들은 화폐로 거래를 하기보단 그동안 모았던 칭찬 스티커나 카드 등으로 거래를 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저 기억 조각도 그런 칭찬 스티커와 다름이 없죠. 대신 남은 칭찬 스티커가 현금으로 환전되지 않는 것처럼 조각도 나중에 현금으로 환전을 할 순 없습니다. 가끔 변태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기억을 엿보려 모두 먹어치우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장이 끝나면 대부분 그 사람한테 가서 조각을 팔곤 합니다.”
“끔찍한 결과네요.”
“어떻게 보면 서로 이익이죠. 파는 사람은 본인의 기억을 잊을 수 있고, 사는 사람은 그걸 토대로 다른 경험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고.”
“행복한 기억도요? ”
“무뎌진 기억이기도 하죠. 행복한 기억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행복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 처음 그 감정을 느꼈던 감정을 파는 겁니다. 다시 설레었던 때로 돌아가려고요.”
대화가 너무 빙글빙글 돌아간 듯했다.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쥰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한번 내뱉었다.
“그래서 왜 당신의 손에는 조각이 없는 건가요? ”
한껏 날카로워진 말투에 쥰지는 멋쩍은 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뭐라고 설명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두 분이 한 번쯤은 경험을 제대로 해보셨으면 좋겠네요.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
쥰지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나랑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호객을 하러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좀처럼 현금으로 계산을 하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질 않았다. 대부분 골동품을 집어 들고 기억 조각을 건네기 일쑤였다. 조각마다 정확한 가치도 몰랐기에 거래를 하고 난 뒤 찜찜함은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기억을 팔아야 한다니. 이런 잔인한 모순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어쩌면 이 모순보다 더 잔인한 듯했다.
어느새 세실리아의 기억 조각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닭고기 볶음밥을 사 먹은 뒤로 깨작깨작 과일이나 부채 등을 산 게 전부였는데…… 결국 이번엔 내가 환전소로 들어가 도려내고 싶은 기억을 골라냈다. 남자가 말한 대로 세 살까지 기억을 모두 팔아 손바닥 크기의 조각을 받아냈다. 어차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이었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정 그러면 장이 끝나고 사람들의 기억을 먹는다는 사람에게 전부 팔아버리면 되잖아.”
조각을 바라보는 내 표정이 썩 좋진 않았는지 세실리아가 등을 토닥여주며 말해주었다.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다시 호객 행위를 하러 건널목으로 나왔지만 세실리아는 함께 앞으로 나오질 않았다. 연신 기억 조각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걸 보면 골동품보단 조각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자 절로 한숨이 나와버렸다.
“정 그러면 세실리아, 네가 내 것까지 가게와 함께 잘 지키고 있어. 나는 손님들을 데려올 테니까.”
그러나 세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보다 못 한 나는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해가 지면 시장 문이 닫힐 텐데. 어서 물건을 팔아야지.”
“정오. 넌 거짓말을 했어.”
“무슨 말이야. 어서 가자.”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다 이내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녀가 왜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지, 몸을 움직이질 않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세실리아의 손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천천히 시선을 그녀의 손으로 떨구니 황금빛 가루가 손에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황급히 내 기억 조각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일부가 바스러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세실리아의 입가에 황금빛 가루가 묻어 있었다.
“정오, 너의 학창 시절은 어땠어? ”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건 당황해서도, 놀라서도 아니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서가 오롯이 그 이유였다.
“정말 이 과자가 정오, 네가 갓 태어났을 때의 기억이 맞는 거야? ”
“……”
“그럼 내가 먹어볼게.”
세실리아가 손가락 크기만큼 조각을 떼어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도독, 소리를 내며 조각을 씹는데 턱관절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눈가엔 눈물이 고이곤 했다.
”미안해. 도무지 기억하려 애써도 떠오르지 않을 아기 때 기억보단 그 시절의 기억을 서둘러 없애버리고 싶었어. “
그것은 안쓰러운 눈빛도, 위로의 눈빛도 아니었다. 경멸의 눈빛에 가까웠다. 연주를 마친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지 않으려 피아노 건반에 고개를 처박아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꽃다발은커녕 박수 한 번 보내지 않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홀로 지하철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형편없는 네 실력에 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지 알고 싶구나.”
한 번은 아버지의 질문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경직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막상 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니 어떤 대답도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았다. 사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니 피아노는 일종의 도피처였던 거지.
“정말 간절하다면서 왜 단 한 번도 콩쿠르 입상을 하지 못 한 거지? ”
이어지는 질문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절로 골똘히 생각을 해보게 됐다. 나는 정말 간절한 걸까. 콩쿠르에 입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말 간절하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연습을 할 텐데. 하지만 깨어있는 시간만큼은 밥을 먹고 연신 피아노 건반만 두드렸다. 나름 간절했으니까.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내 내면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고 처음으로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왔다.
하릴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쿵쾅거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 적당히 내리쫴는 햇빛, 적당히 시끄러운 거리는 적어도 내가 관객들 앞에서 건반을 두드릴 때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편안하게 해 주었다. 처음 느껴지는 그 감정이 좋아 이틀은 쉬지 않고 걸었다. 잠이 오면 근처 정자나 카페에서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마트 시식코너에 가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서울 노원구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나의 첫 여행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건 오롯이 돈이 떨어져서이지, 아버지는 내게 문자 한 통 주지 않았다.
홀로 떠난 여행을 계기로 나는 모든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예고에서 일반고로 전학을 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수학 기호와 익숙하지 않은 영단어에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피아노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에 꾹꾹 눌러 참고 견뎌내기로 했다. 물론 성적도 처참했고, 수능 점수도 썩 좋지는 않았다.
대학교는 성적에 맞춰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수업 횟수가 늘어날수록, 같은 학과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회의감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꿋꿋하게 피아노를 했던 일이, 갑작스레 피아노를 그만두고 공부를 선택한 일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와 결국은 대학교를 자퇴하도록 만들었다. 다시 돌아보면 나는 어중간한 사람 자체였다. 꾸준히 한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쓰레기. 지레 겁먹고 회피하는 도망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자퇴를 하고 한 달도 안 지나서였다. 사인은 몰랐다. 아니, 의사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저 보험금이었다. 보험금을 받으면 무엇을 먼저 할까. 그게 가장 머릿속을 헤집는 고민이었다.
“그럼 넌 뭘 할 거야? ”
장례식을 마치고 같이 피아노를 한 친구와 술을 한 잔 기울이다 그런 얘기가 나왔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 몇 년이 지나 이미 손은 굳었고, 그나마 공부해서 간 대학도 자퇴했는데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술잔을 가득 채워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쌉쌀한 기운이 입가에 퍼지면서 절로 눈을 찌푸렸다. 동시에 뜨거운 알코올이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지만 답답하게 가슴에 걸린 무언가는 쉽사리 내려가질 않았다.
“글쎄. 뭘 해야 좋을까.”
범죄라도 저질러 감옥살이를 한다면, 그게 더 사람답게 살진 않을까 싶었다. 무엇 하나 없는 나는 또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다.
세실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횟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호객 행위를 하거나 물건을 팔려고 할 때만 상업적인 대화만 나눌 뿐이지, 손님이 사라지면 어색한 침묵만이 우리 곁을 맴돌았다. 조각의 일부를 먹는다면 그만큼의 순간만이 떠오른다고 하던데 세실리아는 어떤 장면을 본 걸까. 불현듯 든 생각에 세실리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다.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 질겅질겅 껌을 씹으면서 내가 잊은 기억을 그리는 중일까.
한참 동안의 정적을 깨트린 건 쥰지의 등장이었다. 쥰지는 기억 조각을 잔뜩 들고 가게 앞을 찾아와 골동품들을 쓱 훑어보았다. 양팔로 안아 들은 조각은 어찌나 크던지 쥰지보다도 크기가 커 보였다.
“이 조각 전부면 충분히 여기 물품들을 살 수 있을 겁니다. “
쥰지의 말에 나와 세실리아는 말문이 막혀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득 나중에 저 조각을 팔아버리면 되니 다 팔아버리자는 생각이 들어 곧장 입을 열었다.
“어디 상자나 수레 같은 게 있으신가요? 담아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나는 그가 무언가를 꺼내기 기다리며 손을 모았다. 팁이나 남은 거래는 조각이 아닌 현금으로 해주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억 조각은 환전하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
불쑥 끼어든 세실리아가 묻자 쥰지는 몸의 움직임을 멈추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그랬었나요? 웃기네요.”
쥰지가 멋쩍게 웃은 뒤 드디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어 천천히 종이에 중국어로 적힌 글을 읽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에서 온 쥰지라고 합니다. 제가 그 가게로 와 모든 골동품들을 샀다는 것은 이미 저의 모든 기억을 팔아 낸 뒤라는 겁니다. 기억을 팔아 추억을 인수한다는 게 참 모순적이죠? 그럼에도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곳에 있고 싶더라고요. 제 조각은 굳이 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영영 사라져도 괜찮은 굉장히 하찮은 삶이었으니까요. 제가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도 이런 이유일지 모르겠네요. 처음엔 어떻게 정착을 해야 할지 여러 고민을 했지만 당신들이 ‘추억을 팝니다.’라는 가게 문구에 저도 모르게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여행 선배로서 충고를 하나 드리자면 어서 여길 떠나세요. 적어도 3일장이 끝나기 전까지. 당신이 환전소에서 어떤 기억을 지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여기에 있는 몇몇 동양인 상인처럼 당신도 아무런 기억도 없이 기계처럼 앉아있을지 모릅니다.‘
세실리아도 종이를 힐긋거리며 내용을 훑어본 듯했다. 그의 말대로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하나 싶었지만 아직 우리의 손에는 쥰지의 조각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적어도 이걸 현금으로 바꾸려면 장이 끝나길 기다려야만 했다.
“아님 정오, 꼭 내 기억이라고 물건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일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각으로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좀 사두자. 당장 숙소에서 갈아입을 잠옷도 없어 이틀 내내 같은 옷이잖아.”
이제 생각해 보니 정말 우리가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던 것 같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정적을 깨고도 말을 꺼낼까 싶었다.
“그럼 쥰지 씨의 기억을 받고 물건을 전부 주자는 거지? ”
“안 될 거 뭐 있어. 어차피 우리와는 남이고, 우리의 목적인 물건을 팔자는 건 결국 성공한 거잖아. 문제 있어? ”
“그래. 애초에 우린 현지인이 아니고 여행객인데 너무 물건을 파는 일에 집착한 것 같다. 받고 우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우리는 골동품들을 쥰지의 가방에 일일이 넣어주었다. 그리고 골동품들을 닦았던 솔도 함께 넣어주었다. 한껏 무거워진 가방의 무게에 끈이 축 늘어졌지만 더 이상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쥰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우리는 그의 조언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적어도 장이 끝나기까지 시장을 떠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국가던 시장의 매력은 들뜬 기분을 흠뻑 적시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나와 세실리아는 못난이 모자와 싸구려 선글라스, 난잡한 무늬 원피스를 입고 여행객이란 사실을 여기저기에 뽐내고 다녔다. 쥰지의 조각을 포함한 일단 조각은 모두 손바닥 크기로 부숴 가방 안에 꽉 채워 넣었다. 어쩌면 이 시장 안에서 우리가 가장 부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생각은 간단한 옷부터 과일, 먹거리 등 과감한 소비를 이끌게 했다. 손에 쥐거나 몸에 걸친 물건이 많아질수록 가방은 점점 가벼워졌고 조각은 현금보다 더 빨리 바닥이 나버렸다.
“정오, 벌써 조각이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우리 앞으론 신중하게 소비를 해야겠는걸.”
그녀의 말대로 신중한 소비를 하기엔 아직 달이 뜨지도 않았고 3일장이 끝나기까진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
“아직 내가 0세부터 3세까지 기억을 바꾸지 않았잖아. 정 부족하면 다시 가서 환전하고 오면 되지.”
“과연 우리가 그걸로 끝이 날까? ”
“그래야지. 우리가 여행을 다니는 목적은 행복했던 순간을 이따금씩 떠올리기 위해서가 아니야? ”
“그럴 수 있지……”
3일간 시장은 해가 저물어도 열렸다. 과일가게 등은 문을 닫지만 그 자리에 맥주 가게 등이 들어왔기에 시장의 시작은 야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와 세실리아는 가장 먼저 들어온 맥주 가게를 보고 곧장 자리를 잡았다. 병맥주 두 병에 닭튀김 안주 하나. 그 메뉴에 가방에 든 모든 조각을 털어냈지만 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족하다고 말했다. 결국 내가 먼저 환전소로 달려가 0살부터 3살까지의 기억을 환전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주문했던 메뉴에 맥주 두 세 병 정도 더 주문할 조각이 남았다.
“정오, 우리 그냥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
세실리아가 고개를 들이밀자 들이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괴로웠든, 다시 새로움을 느끼고 싶든 잊고 싶은 기억이 있잖아. 우리 그냥 과감하게 그 기억들을 지워 환전하자. 대신 그 일부를 서로가 먹어주는 거지. 어차피 내가 먹는 건 소용이 없잖아.”
“그래.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부끄러운 기억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고, 어렸으니까 라는 변명이 찰떡같이 어울렸던 나이였으니까. 그러니 보여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럼 이것까지만 먹고 가서 환전을 해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세실리아는 절반 정도 남은 맥주를 모두 비우더니 곧장 환전소로 달려갔다. 이미 0살부터 3살까지 기억을 지운 세실리아는 이번에 어떤 시절의 기억을 지울까. 차마 물어본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물어보기에 이미 그녀의 뒷모습은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다시 세실리아가 돌아왔을 땐 양손 가득 기억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어떤 기억인지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대답을 하지 못할 걸 알았기에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결국 조각을 하나씩 잘게 부수어 입에 넣었다.
“꺼져 이 사기꾼아.”
“내가 널 고소하지 않을 걸 고맙게 생각해.”
날카롭게 곤두 선 눈빛, 세실리아를 향한 손가락. 주저앉은 자리 위로 보이는 샤넬 로고. 거기까지가 내가 먹은 조각 일부의 기억이었다. 잇따라 다른 조각의 일부를 입 안으로 넣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어머니가 한 달도 남지 않으셨어요. 꼭 하루만 이 가방을 손에 쥐어드리고 싶어요.”
이번엔 세실리아 앞에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샤넬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번 조각도 딱 여기까지가 보이는 장면이었다. 분명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그녀를 향한 눈빛이 안쓰러워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마무하기로 했다.
“위스키 한 잔만 마실까? 마침 위스키가 먹고 싶었는데.”
세실리아는 주인을 향해 브이자를 보이며 위스키를 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샷잔에 가득 감긴 투명한 위스키는 책상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파장을 만들어냈다. 투명한 위스키 잔을 맞닥뜨리고 투명한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걸 느낀다. 어디쯤 내려가는지 느껴지는 위스키는 이토록 투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 일부를 보여주면서 이런 안쓰러움을 서로 느끼는 건…… 투명하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여전히 진한 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은 선명하게 본인을 뽐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시장에서 내는 불빛은 눈을 질끈 감도록 해주었다.
“이번엔 물건을 모두 팔았다고요? ”
아침에 찾아온 관계자는 텅 빈 진열대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거래는 어떻게......”
“현금 거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날이 날인지라 조각으로 거래가 된 게 더 많아요. 그래서 장이 끝나도 며칠 더 묵어 또 가져다 팔려고요. ”
관계자는 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서 하셔요 그건. 다만, 저는 현금 거래의 17프로만 받고 조각으로는 절대 받지 않을 거니 그것만은 단단히 알아두시죠. “
이번에도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팔 물건을 구해 들였다. 점점 물건들이 낡아빠지거나 시커맣게 그을려져 있었지만 어금니를 깨물며 먼지를 닦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환전소 앞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는 가지런하게 물건을 진열하며 오늘 만큼은 물건을 팔아 받은 기억 조각으로 하루를 해결하자고 다짐했다.
쥰지는 어느새 가게를 구했나 본지 골동품이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손을 흔들자 그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파이팅입니다.”
쥰지가 웃으며 외쳤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경쟁자가 된 셈인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 활짝 웃을 수 있을까. 이게 모두 기억이 사라진 덕분일까...... 한편으론 그가 안타깝게 보이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람들은 골동품들을 보고 볼멘소리를 냈고, 나와 세실리아는 그들의 구매 욕구를 이끌어내기 위해 추억을 불러 일이 키는 온갖 말들을 해댔다. 그럼 대부분 사람들은 현금 대신 기억 조각을 건넸고, 그 조각으로 점심이나 음료, 과일 따위를 사 먹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흘러갈 것 같다는 예상에 어디론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 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린 뒤 시장 안은 잠시동안 정적이 일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세실리아는 건널목으로 나와 사람들이 몰린 곳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를 말리려 나도 앞으로 나아갔지만 면허나 한 곳을 바라보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나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사람들이 잔뜩 북적이는 곳은 다름 아닌 쥰지의 가게가 있던 곳으로 특별한 행사나 즐거운 볼거리 탓에 모인 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세실리아, 잠시만 여기서 가게 좀 보고 있어 봐. 내가 금방 가서 물어보고 올게.”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곧장 사람들이 몰린 곳을 향해 달려갔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엉만진창으로 어질러진 골동품들 위로 쥰지가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 깨진 골동품에 살이 찢겨 피가 나고, 여기저기 상처가 보였지만 괴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은 더욱이 흥건한 피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봐 쥰지 씨, 정신 차려요. 쥰지 씨! 쥰지 씨!”
아무리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만이 귓가를 간질일 뿐이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잡상인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씨구. 그렇게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자기의 기억 조각을 먹지 말라 일렀는데......”
갑자기 뒷목에 식은땀이 떨어졌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은 아무리 침을 묻혀도 싸늘하게 말라가기만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실리아를 향해 달려갔다. 점점 쥰지의 비명소리가 사그라들더니 컥, 소리와 함께 정적이 되었다.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참을 수 없이 떨리는 심장소리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어도 파르르 떨리는 손이 멈추진 않았다. 세실리아가 보이자마자 덥석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서 가자. 여기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물건들은 어쩌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쥰지가 처음에 한 말 기억 안 나? 적어도 3일장이 끝나기 전까진 이곳을 뜨라고.”
“그런데 왜? ”
“그는 우리에게 그 말을 건네곤 곧장 기억을 지우러 갔던 거야. 자신의 모든 기억으로 물건을 사면서 일부는 자기가 감추어놓았나 봐. 그리고 호기심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먹어버린 거지.”
“그럼 왜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거야? ”
“그건 모르겠어. 그런데 저거 보여? ”
나는 사람들이 몰린 곳을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저렇게 소란스러운데 사람은 저게 전부야. 근데 모두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
세실리아는 몸을 갸우뚱 기울여 사람들이 몰린 곳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네… 우리 가게에 들렀던 사람이 한 명씩은 있어.”
“심지어 쥰지에 가게에서 어제 샀던 물건도 손에 쥐고 있어.”
“그럼 네 말은……“
“맞아. 저 사람들은 어제의 기억까지 지워버리고 물건을 사는 거라고.”
“그럼…… 결국 장이 끝나면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인 채로 남는 거네. “
나는 곧장 세실리아를 끌어당겨 숙소로 향했다. 도망을 치는 이유는 분명했다. 세실리아를 잃을까 봐. 세실리아의 기억이 모두 지워질까 봐. 우리가 끝이 나버릴까 봐……
숙소로 돌아오고 우리는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어제 관계자에게 받은 돈 몇 푼으로 겨우 저녁거리를 사서 만드는 내내 서로 입 한 번을 열지 않았다. 나는 연신 세실리아를 힐긋거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
수프가 끓자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프를 한 숟갈 입에 넣는 찰나, 세실리아가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이 시장 마지막이겠네.”
“시장의 마지막은 아니지. 기억을 환전하는 환전소가 마지막인 거지. 아니, 내년에도 열린다면 이것도 마지막은 아니야. “
“정오. 너는 여기 다시 올 것 같아? ”
“음…… 아니. 안 올 것 같아.”
어색한 대화의 마침표가 찍히고, 다시 한동안 우리는 식기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냈다. 불현듯 쥰지의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럼 어떻게 됐을까. 결국 본인의 기억 조각을 먹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연신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지워버린 기억이 어떤 기억들이었는지 불현듯 궁금해지긴 했지만 나중에 세실리아를 통해 듣기로 해야겠다.
저 얼굴은 분명 아버지다.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건반을 두드렸고 음악이 절정에 달할수록 아버지의 발소리는 더욱이 빨라졌다.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면 박수 소리가 아닌 혀 차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버지는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들리는 한숨 소리는 훈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훈계를 마친 아버지는 등을 돌려 곧장 방으로 들어가셨다. 쾅, 닫히는 소리에 나는 눈을 번뜩 뜰 수 있었고 텅 빈 숙소 안에 홀로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실리아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이제 막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화장실, 마당 등 숙소 곳곳을 돌아봐도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철렁 이게 만들었다. 나는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고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이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 소리는 더 괴롭게 가슴을 후벼 팠지만 확인이라도 하지 않으면 결국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우리가 골동품을 팔던 가게엔 세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엔 우리 가게가 있었다는 네모나게 그려진 부분만 먼지가 덜 쌓여 흔적으로 남겨졌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시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갔던 맥주가게, 바나나를 샀던 과일가게, 닭고기 볶음밥을 먹었던 식당 등 샅샅이 가게를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향한 건 시장의 끝자락, 쥰지가 있었던 가게였다. 불교용품 사이로 몇몇 개의 골동품 가게가 보였지만 그 뒤에 서있는 상인은 세실리아가 아니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고, 다시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딱 쥰지가 있었던 그 가게. 그 진열대 뒤로 세실리아가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세실리아,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놀랐잖아. 이제 그만 집에 가자...”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세실리아는 고개만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혹시... 정오 씨 맞으신가요? ”
세실리아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늘 나와 있을 땐 한국어를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응... 나야, 세실리아. “
그녀는 아, 소리를 한 번 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게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건넸다. 접힌 자국 맨 위에는 ‘정오라는 이름의 남자가 나타나면 건넬 것’이라고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어 빼곡히 적힌 글씨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정오.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면 아마 내 모든 기억을 지우고 이곳에 정착을 다짐한 이후일 거야. 우선,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사실 처음에 내가 바꾸었던 기억은 0살부터 3살까지 기억이 아닌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겪었던 기억이야. 분명 기억을 지웠을 텐데 어떻게 아냐고? 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기억 조각 일부를 떼어내 간직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너와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나는 정오 몰래 그 조각을 먹었었어.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잠깐 머릿속을 떠났던 기억이 돌아오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나를 옥죄어오더라. 아마 자신의 기억 조각을 먹지 말라던 건 그때 느꼈던 괴로움이 더 크게 와닿기 때문인 것 같아. 고통의 순간이 끝나고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여행을 떠나왔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 끝내 내린 결론은 그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어. 세실리아,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주변 환경을 바꾸자고. 그런데 내가 모든 기억을 다 지우고 여기에 남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결국은 과거를 완전히 버려두고 새 삶을 향해 도망치는 거나 다름이 없네. 정오, 너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너만큼은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1년 뒤에 다시 장이 열리면 그때 나를 보러 와줄 수 있어? 아마 나는 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라도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편지를 모두 읽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아랑곳 않고 손바닥 크기의 가방을 내게 건넸다. 딱 보아도 짝퉁이었지만 가운데에는 샤넬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가방의 역할도, 샤넬의 역할도 못 하는 이 물건은 그저 그녀를 회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받아 들고 내 기억 조각을 그녀에게 건넸다.
“일 년 뒤에 만나자.”
그녀에게 건넨 조각을 마지막으로 주머니는 텅 비어버렸다.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기억을 팔아야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내년 추분이 올 때까지 하릴없이 골동품을 만지작거리겠지. 걷잡을 수 없이 길었던 여행을 잠시 마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시만, 바쁘게 도망치느라 돌아보지 못 한 길을 다시 돌아봐야겠다고.
기억을 모두 팔아 가게를 인수해 버린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분명 나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내년 추분까지 그녀가 보이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