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을래? “
은광은 메뉴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 보통. ”
“너 나중에 또 배고프다고 할 거잖아. 그냥 곱빼기 먹어.”
“됐어.”
단무지와 양파가 나오자마자 금세 그릇을 비웠다. 그렇게 은광은 짜장면이 나올 때까지 단무지와 양파를 세 번이나 리필했다. 아직 입 안에 양파가 남았는지 짜장면을 씹을 때마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면을 모두 먹어 치운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찾아? ”
“그냥…… 밥 있나.”
“그냥 공깃밥 시켜줄게. 먹어.”
“됐어.”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남은 춘장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댔다. 내가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을 때까지 그릇을 긁는 수저 소리는 끊기질 않았다.
“담배 필 거야? ”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은광의 손에는 박하맛 사탕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당연히 그의 주머니는 휴지와 물수건을 욱여넣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됐어. 끊었어. ”
나는 혓바닥으로 박하맛 사탕을 굴리는 그를 뒤로하고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자 입 안에 남은 짜장면의 느끼한 춘장이 녹아 없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은광이 불이 붙은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한 대 줘? ”
은광은 못 이기는 척 담배를 한 대 받았다. 그리고 입 안에 굴리던 박하맛 사탕을 까드득 깨문 뒤에야 불을 붙였다.
“너도 참…… 안쓰럽다.”
가로등들이 일제히 꺼지고 어둠이 서렸다. 그러나 골목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나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다 잠에 들려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잠에 들려고 할 즈음, 짧은 폭포소리에 다시 눈이 떠졌다. 이어서 시큼한 위산의 냄새와 소화가 되다 만 음식물들의 악취가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광아, 그냥 우리 문 닫으면 안 돼? ”
“안 돼. 안 그러면 곰팡이 펴.”
은광은 눕힌 몸을 돌리며 이불을 걷어냈다. 토사물을 게워낸 만취객은 속이 후련했는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노래보다는 소음에 더 가까웠다. 은광이 걷어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얊은 싸구려 이불은 소리까지 걷어낼 수 없었다.
잠이 모두 달아나 담배라도 피우러 밖으로 나와보았다. 방금 그 남자가 지나간 자리엔 역겨운 자국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담뱃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달빛마저 닿지 않는 캄캄한 동네, 그 동네보다 더 밑으로 처박힌 집. 이런 꼴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불이 붙은 담배가 전부 다 탈 때까지 한 모금도 못 들이켜고 눈물만 쏟아냈다.
너무 좁아 오토바이도 간신히 지나가는 골목. 그곳에 다 타버린 메비우스를 든 채 쪼그려 앉아 눈물만 흘리는 내가 처량하고 안쓰러웠다. 어쩌면 내가 정말 안쓰러워하는 사람은 은광이 아닌 나였을지도 몰랐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아직 한밤중 같았다. 그러나 시계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믿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은광은 이미 일어나 라면을 끓일 물을 끓이고 있었다.
“늦게 일어났네.”
은광이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천장 높이 올리는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은광은 평소와 달리 수염도 깎았고, 머리도 정갈하게 정리한 채였다. 가장 의아했던 건 그에게서 페브리즈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나는 냄새가 나는 그의 옷을 향해 콧잔등을 기울였다.
“이거 무슨 냄새야? 너 오늘 어디 나가? ”
“면접.”
“면접? 너 그런 얘기 없었잖아.”
“그랬나…… ”
이미 그가 멀쩡한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간다는 건 불가능한 전제였다. 보아하니 최대한 나이를 속여 식당 정직원으로 면접을 볼 속셈인 듯했다.
물이 끓자 절반 남은 스프와 후레이크를 넣고 남은 반쪽 면사리를 집어넣었다.
“엊그제 먹고 밀봉을 안 해놔서 면이 좀 눅눅할 수 있어.”
”그럼 조금 덜 끓여. “
붉게 끓어오르는 라면 국물이 면사리 사이사이에 베면서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면을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젔다가 가스불을 껐다. 식탁 위에 올라온 라면은 볼품없이 적었다. 차라리 먹다 남긴 거라고 하는 게 더 그럴듯했다.
“면접 몇 시에 보러 가는데.”
“이거 먹고 바로 가야 해.”
“어. 잘 보고 와.”
“너도 일자리 좀 알아봐.”
“요즘 최소한 고졸 이상은 되어야 뽑아서 쉽지 않네.”
“……먹자. “
한때 내게 은광은 신용 점수가 만점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매긴 그 점수에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남은 여생을 맡기려고도 했다.
“넌 언제 걔랑 헤어질 거야. 네 인생만 이렇게 비참해지는데.”
나는 차마 은광의 빚이 나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힘들면 나한테 말해. 비싼 건 못 사주더라도 밥 한 끼나 술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어.”
“고마워……”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고마웠지만 가슴속 일렁이는 죄책감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은광의 면접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신발을 벗고, 옷가지를 벗는 동시에 술냄새가 코를 찌르며 들어왔다. 코를 막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반쯤 감긴 그의 눈은 차마 쓴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 기제 같았다.
“미안. 늦어서.”
은광은 신발장에서부터 몇 발자국 안 떨어진 바닥에 벌러덩 몸을 뉘웠다. 남은 옷들과 양말을 벗기려 안간힘을 썼지만 은광의 무게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정원이는 오늘 뭐 했어? ”
은광이 바닥에 누운 채 물었다. 술에 취해 잔뜩 혀가 꼬인 탓에 발음이 어눌하게 흘렀다.
“언니 잠깐 만나고 왔어.”
“잘 지내시려나…… 하하.”
은광의 실없는 웃음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곤 그의 코골이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다.
두 치수나 큰 대형마트 유니폼은 그를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새 유니폼이 발주 오기까진 사흘이나 기다려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퇴사자의 유니폼을 입어야만 했다. 명찰도 유니폼의 전 주인의 이름 위에 사인펜을 덧칠해 은광의 이름을 적었다.
오늘은 닭이 많이 들어와 옮겨야 할 상자가 잔뜩 있다고 했다. 여름이었고, 복날은 아니었지만 대형마트는 생닭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했다. 주변에도 닭볶음탕집이나, 삼계탕집 같은 닭요리 가게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은광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을 했다. 그가 집을 비우면 나는 신문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일을 찾아보았다.
그럴싸한 직종에 괜찮은 급여는 늘 ‘고졸이상’을 요구했다. 한때 은광은 집에만 있는 날 한심하게 바라보았지만 이젠 집에 있는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단기 아르바이트나 일일 아르바이트로 급한 생활비는 때울 수 있었다. 유일하게 호텔 서빙 아르바이트를 가장 오래 했는데 지나칠 때마다 엉덩이를 만지거나, 번호를 달라는 진상 때문에 호텔 서빙 아르바이트는 안 하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유상무상한 인생이었다. 아마 은광을 계속 만나지 않았더라면 화류계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 안쓰러운 건 내가 아닌 은광이었다. 그는 좋은 직장에 취직해 좋은 연봉을 받으며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의 모든 걸 망친 건 나였다. 그럼에도 난 은광을 지긋지긋해하고,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믿는다고 하는 달콤한 속삭임 탓에 난 은광을 놓지 못했다. 그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변변찮은 나를 믿는다는 은광의 말을 어루만지고 싶었으니까…… 내가 일부로 꽉 잡아 놓지 않은 거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속박할 때가 있다. 달콤한 말과 스톡홀름 증후군. 은광은 지쳤다. 그는 떠나고 싶다. 내가 그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 등을 돌렸던 그가 다시 나를 감싸 안아준다. 그러나 기대와 다른 내 모습은 마치 폭력과 같다. 매번 똑같이 이 레퍼토리는 반복된다. 나는 너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나의 달콤한 속삭임에 넌 돌아온다.
나는 너를 속박했다. 우리의 시간은 멈추었다. 일렁이는 빚은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그 위를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난 너를 놓을 수없었다.
내야 할 돈이 6만 원 정도 부족했다. 그날은 하필 대형마트 사장이 사정이 있다며 직원들 월급이 일주일 정도 늦겠다고 한 날이었다. 은광은 이런 일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 굳이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귀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연신 다리를 떨어댔기에 알 수 있었다. 하루정도는 연체는 괜찮다고 달랬지만 붉게 상기된 은광의 얼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당일 지급이 된다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전단지 배부 아르바이트치 곤 시급이 세 곧장 지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단지 배부처인 헬스장에 도착하고, 담당 직원은 내게 인형탈을 보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지만 내야 할 돈을 메꾸어야 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인형탈 옷을 입었다.
머리와 몸이 접히는 곳곳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뜨거운 8월의 햇살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옥죄였다. 좁은 구멍은 숨조차 쉽게 쉴 수 없게 해 주었고, 흠뻑 젖은 땀 때문에 동작 하나하나가 엉성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 채 내가 건네는 전단지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니, 차라리 그냥 지나가는 게 다행이었다. 어린 아이나 몇몇 사람들은 내 옆에 꼭 붙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들의 온기가 닿을 때마다 인형탈 안의 온도는 더 뜨거워졌다. 내뱉은 숨결마저도 뜨겁게 댑혀질 즈음 지옥 같던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났다. 탈을 벗자마자 양말과 옷에 고인 땀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내렸다. 직원은 복귀한 내게 곧장 물 한 병을 건넸다.
“고생 많으셨어요. 전 당연히 남성분이 지원하신 줄 알았는데 괜히 더 죄송하네요. “
“어디 돈 버는 게 쉬운 가요.”
봉투를 받자마자 집으로 곧장 가고 싶었지만 헬스장 안 가득 채워진 에어컨 냉기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괜찮으시다면 여기 아르바이트 지원 해보세요. 인형탈 알바는 아니고 간단한 카운터 알바인데 인형탈 알바 같은 거 하시기엔 외모가 너무 아까우셔서요. “
“저를요……? ”
“네. 마침 지금 카운터 아르바이트생이 곧 그만두거든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시급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업무 강도도 그리 센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몸 좋고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연락처 남겨드릴게요. 연락 주세요.”
우선 급한 은광의 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봉투를 챙겨 나왔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은광이 들어왔다. 축 늘어진 팔 밑에는 검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그건 뭐야? ”
은광이 봉투를 한 번 들어 보였다.
“닭꼬치.”
“웬 닭꼬치? ”
“너 먹으라고. 좋아하잖아. “
은광의 눈가가 시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차마 일을 구할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쓰러지듯 바닥에 누운 뒤 잠에 든 은광. 은박지에 싸인 닭꼬치 위로 양념이 비집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박지를 벗기자 양념이 잔뜩 발려진 닭고기가 드러났다.
빚이 있더라도 동거를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은광은 삐그덕거렸다. 월세를 내고, 이자를 갚으면 다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사실 사랑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서 은광은 필요한 것들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지쳐가는 은광의 모습을 보고 그의 발목에 채운 수갑을 풀어야 함을 느꼈다. 그는 절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더라도 쿠폰을 꼭 챙겼고, 간식거리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둘이서 라면 한 봉지를 반으로 쪼개어 끓여 먹었고, 아무리 추워도 이불 두 겹으로 바람을 막았다. 그런 은광이 닭꼬치를 사 왔다. 무려 세 개나. 곤히 잠든 은광을 보며 이유를 찾아보려 했으나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파와 함께 닭고기를 입 안으로 넣었다. 부드러운 고기를 씹자마자 육즙이 터져 나왔다. 고기는 아직 식지 않아 혓바닥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이 닭꼬치의 의미를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
최근 들어 라면을 먹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라면을 먹는 날이더라도 인당 한 봉지씩 끓여 먹었다. 은광을 마주 보고 앉아 반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는 게 행복했다. 이 시간만큼은 빚에 대한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빚. 우리는 그것에 쫓겨 이런 소소한 행복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일은 할만해? ”
“그럭저럭. 귀찮게 구는 트레이너가 하나 있긴 한데 뭐, 돈 벌려면 견뎌야지.”
“그래…… 다행이네.”
소소한 대화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빚이 쌓이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 일과를 나누며 밥을 먹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덕분에 이 소소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것임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넌 빚 다 갚으면 뭐 먼저 하고 싶어? ”
김치를 먹으려다 말고 은광에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는 없었다. 그저 궁금했던 것이었다. 나 때문에 함께 빚의 늪에 빠져버렸기에…… 당연히 이 늪에서 벗어나면 나부터 멀리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이사 가야지.”
“그게 다야? ”
“그냥 앞 날을 천천히 생각하는 거지. 일단 빚 다 갚으면 이 지긋지긋한 집 먼저 떠나야지.”
은광이 젓가락으로 밥 알갱이를 동그랗게 말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는? ”
“…… 글쎄. 빚을 다 갚으면 내 삶도 끝나는 게 아닐까.”
“간단한 답변이네.”
“네가 생각했을 때 뭘 했으면 좋겠어? ”
‘너를 떠나보낼 거야.’라는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그것이 이치고, 옳은 일이니까. …… 의도가 없을 거라 생각한 내 질문들은 이제 원하는 답이 있는 듯했다. 은광이 하고 싶은 말과, 내가 들어야만 하는 말이 일치되는 걸 기다리는 나였다.
“새로운 멋진 삶을 살아야지. 한 발자국씩 나아갔으면 좋겠어.”
“은광아, 너는 나 사랑해? ”
“사랑하지.”
“……”
빚이, 나는 너에게.
처음으로 잔고가 ‘0’이 되고 나는 너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명하게 남겨진 0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이 0이 이도저도 아닌 내 모습 같았다. 나는 더 이상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되지 않고 온전히 0에서 동결되길 바랬다.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힌 빚은 마이너스, 너는 플러스, 나는 그 사이에 낀 0. 그런 어설픈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였다.
빚을 모두 갚는 날이 오긴 했다. 나는 분명 빚을 갚으면 은광을 보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만하자고 하는 말은 계획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는 언제나 날 믿어주었어. 그렇지? 그 많은 빚을 진 것도 다 내 탓인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마저 모두 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턱 근육은 내 얼굴은 온전히 마비시켰다.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이제 사람도 잘 못 믿고 의심부터 하게 돼. 뒤통수치고 도망가지 않을까 하고.”
돈은 어떻게든 갚을 수 있을 거라 애써 믿었다. 착실히 일을 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어떻게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갚을 수 있을 거라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내가 아닌 은광에게 짊어지게 한 것이었다. 온전히 그 짐들이 내 어깨 위에 있었더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문제는 이미 은광의 세계가 변해버린 것이었다. 변해버린 은광의 세계는 믿을 수 없는 인간과 가치들만이 존재했다. 잘 된 일일까? 이제 그가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망하지 않길 바래.”
“이미 망한 것 같아.”
“아니야. 넌 하나도 안 망했어.”
이제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은광은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 말을 할수록 은광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남자가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은광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멍청한 일을, 나의 멍청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를 따라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애써 나를 감싸며 내가 망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라는 게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는 나를 애써 등 돌리고,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앞에 그 누구도 세워두지 않을 것이었다. 은광이 그저 내 곁에 있어준 건 우리가 겪은 일에 본인도 책임이 있다 여겼고, 나를 이해해주려 한 것이었다.
사는 게 참 쉽지 않아.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거든. 그냥 죽어버리는 게 가장 빠른 문제 해결법이지 않을까? 근데 누구 좋으라고…… 씨발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아니, 너는 좋을 수 있겠다.
일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뭐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빚은 갚아도 갚아도 줄어들지 않고, 취미 하나 없어서 인생의 낙 하나 없는데.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흔들리는 너의 말은 날 괴롭게 만들었다. 은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지내.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으니까.
은광의 등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난 그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