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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Dec 29. 2022

하얀 것



  식탁보를 하나 샀다. 식탁보는 한 번 빨고 쓰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 곧장 스마트폰으로 식탁보를 빨래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검색창에 나열된 방법은 대부분 손빨래를 해야 한다고 내게 일렀다. 새햐얗던 식탁보를 락스를 푼 물에 담갔다. 그러니 정말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때가 나와 순식간에 락스물이 구정물로 변해버렸다. 나는 햇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더 하얘진 식탁보를 널어놓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서둘러 저 식탁보를 식탁 위에 깔아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티브이를 켜놓고도 오늘은 쓰지 못할 식탁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티브이에선 다큐멘터리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펭귄들이 비추어졌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남극의 땅, 펭귄들은 그 위를 미끄러지기도 하고 차가울 것 같은 바다 위를 헤엄치기도 했다. 그때, 불일정한 패턴으로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펭귄에게 빠져 남편의 퇴근시간이 왔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남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코트를 내게 건넸다.

 “밥 안 먹었어.”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같이 먹자는 건 더욱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밥을 깜빡하고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남편의 싶은 한숨이 들렸다. 역모를 꿈꾼 사람이 사약을 기다릴 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오늘은 나가서 간단하게 먹어요……. 차마 고개를 식탁보가 널려있는 방향으로 돌릴 수 없었다. 식탁보는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아 끝자락에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래, 옷 입고 준비해. 난 나가서 담배 하나 피우고 있을게.”

  남편이 가방을 소파 위에 올려놓고 다시 신발을 구겨 신었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있는다는 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오라는 뜻이었다. 얼굴에 무언가를 덧칠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문득 저번주에 백화점에서 세일해서 산 구두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놓고 한 번을 못 신었다. 나는 구두를 신을까 하다가 옆에 놓인 운동화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분명 새햐얗던 운동화였는데 벌써 색이 바래 아이보리색에 가까운 신발이었다.

  허겁지겁 나오니 아직 남편의 담배 길이는 절반정도 타있었다. 그가 입과 코로 내뿜는 담배연기는 적나라하게 뿜어져 나왔다가 은연중에 사라졌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집 앞에 조촐하게 놓인 김밥천국이었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없고 식기끼리 부딪히는 소리, 아주머니가 김밥을 싸는 소리만이 식당에 깔렸다. 나는 새하얀 그릇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김밥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엄마가 만들어준 묵은지 김밥이 정말 맛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남편이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되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부리고 말았다. 남편의 앞에는 김밥과 라면이 놓였다. 그는 아주머니가 음식을 내려놓기 무섭게 김밥 꼬다리를 라면 국물에 푹 담갔다. 새하얬던 밥알에 라면의 붉은 국물이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자장가 같던 식당의 소리 위에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덮였다. 나는 귀를 막으려고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그릇 위에 남은 깨 개수를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잘게 썰린 김밥이 하나하나 사라질 때마다 접시 위에 남은 깨와 기름자국이 하얬던 그릇을 더럽히고 있었다.


  집에 와서도 여전히 식탁보는 마르지 않았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내일 장을 볼 리스트를 적어 내렸다. 뒷다리살, 양파, 감자, 고춧가루, 배추…… 아, 엄마가 해준 묵은지 김밥이 먹고 싶다. 또다시 혼잣말이 나왔다. 깨끗하게 씻은 묵은지를 단무지 대신 넣어 아삭거리는 김밥. 하얀 묵은지는 없어진 입맛도 순식간에 돌게 해주었는데. 식탁 위에 앉아 엄마의 생각에 잠기려고 하는데 샤워를 하러 들어간 남편이 문을 살짝 열고 나를 불렀다. 여보, 수건 좀. 수건을 받으러 문 틈으로 살짝 건넨 남편의 팔이 예전과는 달리 거뭇해 보였다. 저이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분명 새하얀 피부였는데. 나는 다시 베란다 위에 널려있는 식탁보를 보았다. 스마트폰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주 주말에 내려갈게. 무슨 일 있냐고?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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