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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친 비

by 루아 조인순 작가

밤부터 퍼붓던 장대비가 잠시 그쳤다. 꼭꼭 닫아건 베란다 문을 여니 습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으로 확 들이친다. 끈적임과 불쾌함까지 따라와 온몸이 눅눅하다. 비가 그친 틈을 놓치지 않고 매미 떼가 소리 높여 울고, 잠자리는 날개가 무거워 낮게 난다. 여름이 깊어가고 있다. 우산을 챙겨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뭇잎들은 물방울을 잔뜩 머금고 있어 무거워 늘어져 있다. 바람이 조금만 나뭇가지를 흔들어도 비가 오듯 후드득 소리를 내며 우수수 떨어졌다. 밤나무에는 작은 밤송이가 매달려 있고, 도토리나무도 콩알만 한 열매가 달려있다. 감나무의 감도 벌써 어린아이 주먹만 하게 자랐다. 모두들 덥다고 아우성치고 있을 때 열매들은 이렇게 소리 없이 조금씩 여물어 간다.


보도블록은 오랜만에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 윤이 날정도로 반들반들하다. 토사가 밀려와 깨알 같은 모래알들이 구슬처럼 반짝인다. 이름 모를 들꽃들은 굵은 빗방울을 견디지 못해 꽃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찢겼다. 그렇게 많던 땅위의 작은 벌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풀잎 속에 꼭꼭 숨어 날이 개기를 기다릴 것이다. 지렁이는 숨이 막힌 지 밖으로 나와 꿈틀댄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가 잽싸게 날아와 지렁이를 낚아챈다.


어디선가 향긋한 꽃향기가 난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넝쿨에 보라색 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한여름에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데, 도시의 야산에서도 칡꽃을 볼 수 있다니 오래도록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칡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땅으로 뻗는 칡은 꽃을 피우지 않는 대신 새끼줄이 귀하던 시절 칡넝쿨이 밧줄 역할을 했다. 반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의 줄기는 쓸모가 없으므로 꽃을 피워 향기로 선물한다. 물론 뿌리야 맛은 같지 않겠은가.


운동장은 방학으로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이곳저곳에 남아 있어 휑하다. 장마로 생긴 작은 웅덩이에 검은 하늘이 담겨 있고, 애벌레들도 있는 것을 보니 모기의 유충 같다. 그네에 고인 물이 바람에 흔들려 조금씩 떨어진다. 운동장을 지키고 있던 수국은 밥공기만 하게 피어 빗방울에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녹초가 됐다.


그 옆으로 애달픈 사랑에 목매는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심술궂은 바람이 해바라기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니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내 얼굴에도 몇 방울 떨어졌다.


한여름의 모락산은 청춘의 절정답게 더욱 탱탱해 보인다. 뭉실뭉실한 운무가 바람이 불때마다 산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을 자무(字撫)한다. 매주 오르는 곳이지만 구름에 휩싸인 산을 멀리서 보니 그 광경도 볼만하다.


연약한 풀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알아 장마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납작 엎드려 있다. 그 속에서 여치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풀이 우거진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 울음의 정체를 밝히려고 가까이 가보니 소리가 뚝 그쳤다. 내심 궁금했지만 풀숲을 헤집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 발길을 돌렸다.


까치들이 한쪽을 응시하며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어 가까이 가봤더니 족제비 새끼들이 나와 있다. 어미는 없고 새끼들만 있어 신기해 한참을 봤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흔히 봤지만 족제비는 처음이다. 잠시 그친 비는 다시 퍼붓기 시작했고,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는 모든 소리를 쓸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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