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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의 교착점

by 루아 조인순 작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굳건히 버티고 서있던 겨울은 어느 덧 봄에게 자리를 살며시 내어주고 떠날 준비를 한다. 자연은 이렇게 때가 되면 새롭게 찾아온 계절을 위해 미련 없이 물러난다.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와 경칩이 지났지만 밤사이 온 대지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다. 눈에 덮인 땅은 꽁꽁 얼어 봄은 생각도 말라고 한다.


그래도 봄이 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차가운 바람 속에 달콤하고 상큼한 꽃향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봄의 정령을 데리고 와 잠든 대지를 흔들어 깨운다. 봄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기 위함이다. 나무들을 흔들어 땅속에 공간을 만들고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어 꽁꽁 언 땅을 녹여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여리고 작은 새싹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올라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황사며 흙먼지가 날려 봄이 싫지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니 싫다고만 할 수가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암컷들은 죽을 만큼 힘든 산고(産苦)의 고통을 겪는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곤충이든 종족번식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기에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자연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산고라는 봄바람이 분다.


어린 시절의 봄은 노란 병아리와 함께 왔다. 겨울 동안 둥우리에서 꼼짝 안 하던 암탉의 품에서 봄이면 노란 병아리들이 깨어난다. 갓 깨어난 노란 병아리는 봄바람에 힘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담벼락에 부딪쳐 꿈쩍도 안 할 때가 있다. 죽었나 하고 쫓아가 건드려보면 다시 일어나 가냘픈 날개를 파닥이며 어미닭을 따라간다.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니 봄바람에 몸을 맡긴다. 개중에는 까만 병아리도 하나씩 섞여 있지만 거의가 노란 병아리들이다.


외출에서 돌아오니 봄바람이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와서 거실 바닥에 펄썩펄썩 내려앉는다. 겨울의 차갑고 뼛속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은 아니다. 칙칙하고 퀴퀴한 거실이 갑자기 활기를 띠며 상큼해진다. 봄바람은 거실에 있는 군자란을 톡톡 건드리고 돌아다닌다. 덕분에 올망졸망한 꽃망울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하나둘 내밀며 궁금해 한다.


친구와 동문들에게서 부모님의 부고(訃告) 소식이 연달아 날아드는 것도 봄이 오고 있다는 징조다. 일주일에 세 통의 부고를 받았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양분이 필요한 것 일까? 봄은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반면 많은 생명을 거두어 가기도 한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사계절 중에 봄에 더 많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봄과 함께 달콤한 꽃향기를 맡으며 소리 없이 쓰러져 간다.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봄에는 계절만 세대교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세대교체를 한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기지개를 켜면서 두꺼운 겉옷을 벗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지만, 봄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고 차갑다. 오죽하면 노숙자들이 겨울보다 봄에 더 얼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겠는가. 봄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희소가치(稀少價値)가 떨어지는 생명을 거두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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