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만 나온 엄마는 외삼촌의 소개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하셨다. 외국을 많이 다니시던 아버지는 부산을 거쳐 서울 신혼집으로 와야만 했는데, 불편함을 느낀 아버지는 산달이 가까운 엄마를 데리고 부산으로 신혼집을 옮기던 중 기차 안에서 첫딸을 낳았다. 그 추운 음력 11월에 기차 안에서 출산을 했으니 산모가 산후조리나 제대로 했겠는가? 아마도 엄마는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3살 때 엄마는 동생을 낳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다. 어느 날 집에 오신 엄마가 탱탱하게 불어난 젖을 어찌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했다. 동생이 다 먹지 못하자 놋그릇에 젖을 짜서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 가끔씩 엄마젖을 먹고 있던 터라 그릇에 짜주는 젖을 무심코 받아 마셨다. 그런데 그 비릿한 냄새가 너무나 역해 토하고 말았다. 그 뒤로 엄마 젖은 동생의 독차지가 되었다.
병원을 자주 가시던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나를 대문 앞에다 새끼줄로 다리를 묶어놓고 가셨다. 동네가 떠나가라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울다가 움직여 끈이 스스로 풀리면 다시 묶으면서 울었다. 참다못한 오빠가 풀어주겠다고 했고, 나는 풀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저녁때 집에 오신 엄마가 아무 말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참에 버릇을 고쳐 놔야 한다고, 언니 오빠에게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했다. 해는 지고 배도 고프고 아무리 기다려도 역성을 들어줄 아빠는 오시지 않았다. 허기에 지친 나는 엄마에게 악을 쓰며 사정을 했다.
“엄마, 제발 이제 그만 울라고 해! 그만 울고 어서 들어와 밥 먹으라고 하란 말이야!”
그렇게 떼를 쓰며 나오지도 않은 억지 눈물을 흘렸다. 밤이 깊어 아빠가 어둠을 뚫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셨다. 그때부터 더 큰소리로 울었고, 아빠는 애를 왜 이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뒀느냐고 한마디 하셨다.
어느 날 엄마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으니까 그렇게 말 안 듣고 떼쓰려거든 네 엄마에게 가라고” 했다. 나중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그때의 충격은 말할 수가 없었다. 5살짜리 영혼에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쳤다. 소낙비가 쉴 새 없이 내리더니 나중엔 폭포수가 쏟아졌다. 얼마나 서러운지 엉엉 울면서 삶은 감자와 옥수수 두 개를 손수건에 싸가지고 집을 나왔다. 친엄마를 찾겠다고 다리 밑을 헤매고 다녔다. 저녁때 집에 온 아빠가 그 사실을 알고 집이 발칵 뒤집혔다. 결국 아빠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고, 그 뒤로 엄마를 따라 어디든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야가 고놈이 당가? 머시마도 아이고 가시내가 즈그 친엄니 찾것다고 집을 나갔담서? 찐 감자랑 옥시까지 싸가지고잉? 나가 그 야그 듣고 귀가 막히고 코가 막혀 배꼽이 뒤집히는 줄 알았당께. 워터게 요런 것을 낳았다냐? 알토랑 것치 야물빡지게도 생겨부런네잉? 곡성댁은 좋컸어. 요런 딸내미가 있어서잉?”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고 더 많이 아프셨다. 결국 막내가 돌을 갓 지나자마자 33살의 젊은 엄마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돼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엄마가 떠나시던 날 밤 기침을 심하게 하며 방안 가득 붉은 피를 토해냈다. 핏덩이가 목에 걸려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숨이 막혀 돌아가셨다. 그 광경을 본 어린 나는 오래도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눈만 감으면 엄마가 붉을 피를 방안 가득 토해내는 꿈을 꿔 비명을 지르며 경기(驚氣)를 했다.
나의 유년 시절은 기복이 심했고, 행복한 기억은 7년이 다였다. 그 후로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7살 이후로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친구들이 흔하게 부르는 엄마를 생각하면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고, 그리움이 사무처 분노가 되었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목이 메었다.
성영혜 외 『아동심리학』을 보면 아이들의 심상은 3~6세 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그때 형성된 ‘이마고’는 평생을 간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가 7년이나 바르게 키워놓고 떠나신 덕분에 살면서 영혼은 늘 외롭고 쓸쓸했지만 한순간도 흐트러지게 살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슬프고 외로워지면 책 속으로 들어가 전 세계 친구들과 놀았다. 그들 중에는 나보다 더 불행한 친구들도 많았고, 덕분에 엄마 생각을 조금씩 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