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15세, 할머니 16세 때 신랑 될 사람 얼굴도 못 보고 혼인하여 8남매를 낳고 70년이 넘게 함께 살고 계시는 노부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양가집에서 혼담이 오고 가자 신부의 얼굴을 몰래 보고 왔는데 예뻤다고 하더군요. 할머니는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종갓집의 종부입니다. 우리나라 종갓집의 대소사는 말로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관습과 풍습은 물론이고, 지역과 가문에 따라 전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사만 해도 1년에 17개가 넘어 허구한 날 제사 준비는 물론이고, 출산하고 그다음 날 바로 제사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시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시부모님과 어린 시동생들까지 식구가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자식들이 태어나도 할머니는 자식보다 시동생들에게 젖을 더 많이 물렸다고 합니다. 시어머니와 거의 같이 출산을 했거든요. 어린 자식이 옆에서 젖 달라고 울고 보채도 쉬고 계시는 시어머니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학업 중에 결혼을 하셔서 색시를 종갓집에 홀로 남겨두고 학교와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대학은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외지로 나갔지요. 그 시절엔 다 그랬습니다. 유학이 별것이 아니었어요. 고향을 떠나 타지로 공부하러 가면 그게 바로 유학이었는데, 그것도 아들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과 봉건적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세대도 그러했고, 현시대에도 진행형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데 부모님 세대야 오죽했겠습니까.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시집가면 그 집에 뼈를 묻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세대입니다. 죽어서도 시집의 귀신이 돼야 한다고 배웠으니 되새겨 보면 섬뜩합니다. 그 말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종처럼 매여 있어야 하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니 너무나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방학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색시가 보고 싶어 어떻게 참고 공부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참기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방학 때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두 분 다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지요. 70년을 넘게 산 노부부는 이제 층층시하도 모두 떠나시고, 시동생들과 자식들도 출가해 빈 둥지만 덩그러니 지키고 계십니다. 벌써 그들의 머리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거나 먼저 가신 분들도 계시거든요.
남은 인생을 즐기며 오순도순 맛있는 것 드시고 재미있게 사시면 되는데, 할머니가 가끔 이유도 없이 할아버지께 벌컥벌컥 화를 낸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난날 혼자서 시집살이하던 때의 서러움이 복받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그것도 평범한 집도 아니고, 종갓집의 종부가 되어 남편도 없는 시간을 홀로 보내며 맵고도 매운 시집살이를 하셨을 겁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가슴속에 꾹꾹 눌러 삭인 상처들이 세월이 가면서 하나씩 고개를 드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쌓여있는 억압과 상처들은 앙금이 돼 자신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다가 어떤 일의 계기가 되면 표출되게 됩니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셀프코칭이 어렵다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지요.
할머니의 성품은 누가 봐도 타고난 종부이며 인자하고 너그럽습니다. 그 많은 대소사를 치르면서도 배고픈 걸인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인자하신 할머니가 가끔씩 가슴속에 감춰둔 송곳을 꺼내 할아버지께 들이밀 때마다 놀라 뒤로 넘어가며 아주 기함을 합니다.
참다못한 할아버지도 항변을 하십니다. 정석대로 산 삶이 잘못이냐고요. 종손이라는 이유로 묵묵히 참고 견뎌야만 했고, 어린 나이에 혼자 외지에 나가 공부하며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고충, 쓸쓸함이 뼈에 사무쳐 자취방에서 혼자 밥을 해먹을 때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머니를 두고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일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면서도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가슴속에 불덩이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얼마나 꾹꾹 눌렀으면 그러겠습니까. 이 노부부의 항변을 듣다 보면 ‘갑’은 없고 두 분 다 ‘을’ 같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자식들이 자신과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고, 종부의 무거운 짐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요. 죽기 전에 그 일을 끝내야 한다고, 좋은 날을 잡아 조상님들을 모두 불러내 모시고 절로 소풍을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연실색하며 별별 투쟁을 다했지만, 할머니의 의지가 너무나 단호해 당할 재간이 없었답니다. 세월이 바뀌고 몸은 늙어도 종부는 종부였습니다. 결단력과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할머니가 멋져 보였습니다.
조상님들도 보고 듣는 것이 있어 설마 했는데 종부의 결정에 혼비백산하여 긴급회의를 했겠지요. 소풍을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앞으로 제삿밥 얻어 드시려거든 집으로 오시지 말고 절에 가서 잡수라고 하니 놀라실 만도 하지요. 그러나 세상이 변한 것을 어찌합니까. 자식들은 다 외지에 나가 맞벌이를 하고 있어 제사는 늘 90이 가까운 할머니의 몫이었으니 방법이 없는 게지요. 그 긴 세월 동안 늙은 종부의 손에 따뜻한 제삿밥을 얻어 드셨으니 줄줄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요즘 세상에 절에라도 모셔주니 감사해야지요.
할아버지는 그날 평생 안 피우시던 담배를 한 대 피우셨다고 합니다.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뒤늦게 문중에서 알고 난리가 났지만 할머니께는 아무 말도 못하셨답니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쓸쓸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시다가 2년이 지나서야 추석날 아들들의 권유로 절을 찾아 조상님들을 뵈었다고 합니다. 차례가 끝나고 점심공양 시간에 딱 한 말씀하셨답니다.
“절 음식도 먹을만하구나!”
이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종갓집 종손과 종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분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리가 사람을 보이지 않는 올무로 옭아매 종속시켜 억압했으니 봉건적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누가 과연 진정한 피해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