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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 조인순 작가 Mar 03. 2024

시간의 기억

   부안 변산반도 마실 길, 푸른 바다언덕에 봄이면 순백의 데이지 꽃이 피고, 가을 문턱을 넘어서면 노란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바다언덕에 해풍을 맞으며 피어 있는 상사화는 황홀함 그 자체다.

  여기 하루 종일 꽃밭을 지키는 한 남자가 있다. 일명 꽃밭지기. 남자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꽃보다 사람이 먼저인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꽃밭을 지키자니 차라리 힘든 노동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시간엔 푸른 바다만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터지는 것 같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꽃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게 싫었다. 사람들이 망가트린 말뚝을 보수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는 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고자 열망하는 남자와 세상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가를 끝없는 질문을 세상에 던지며 길을 찾는 여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다시 긴장했다. 또 부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게 싫었고, 꽃밭을 또 얼마나 망가트려 놓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는 남자는 꽃밭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와 노란 상사화 꽃을 작은 렌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꽃을 찍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꽃과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꽃 가까이 다가가 향기도 맡고, 꽃을 살며시 쓰다듬기도 하고,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서 오랫동안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구월이긴 해도 아직 땡볕인데 뭐 하는 짓인지. 여자가 가까이 오자 남자는 말을 걸었다.

  -아따 뭣 땀시 그라고 꽃을 찍고 그라요? 꽃을 찍어 가믄 보기는 혀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 그랑께 뭣 땀시 그라고 꽃을 찍나 혀서…….

  -시간의 기억을 찍는 거랍니다. 쉬운 말로 순간이라고 하죠. 지금 그대와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은 추억이란 곳에서 나오거든요.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추억이라는 영혼의 자양분에 기대서 살아간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사진을 찍는 것도,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 것도, 다 아름다운 순간을 가슴에 담아두고 삶이 버겁거나 힘든 순간에 꺼내보는 것이지요.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멈출 수가 없기에 다시 일어나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일 겁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해가 되셨다면 이번엔 천 원~!

  -아따 긍께 겁나게 말을 잘 혀요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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