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변산반도 마실 길, 푸른 바다언덕에 봄이면 순백의 데이지 꽃이 피고, 가을 문턱을 넘어서면 노란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바다언덕에 해풍을 맞으며 피어 있는 상사화는 황홀함 그 자체다.
여기 하루 종일 꽃밭을 지키는 한 남자가 있다. 일명 꽃밭지기. 남자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꽃보다 사람이 먼저인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꽃밭을 지키자니 차라리 힘든 노동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시간엔 푸른 바다만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터지는 것 같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꽃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게 싫었다. 사람들이 망가트린 말뚝을 보수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는 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고자 열망하는 남자와 세상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가를 끝없는 질문을 세상에 던지며 길을 찾는 여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다시 긴장했다. 또 부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게 싫었고, 꽃밭을 또 얼마나 망가트려 놓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는 남자는 꽃밭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와 노란 상사화 꽃을 작은 렌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꽃을 찍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꽃과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꽃 가까이 다가가 향기도 맡고, 꽃을 살며시 쓰다듬기도 하고,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서 오랫동안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구월이긴 해도 아직 땡볕인데 뭐 하는 짓인지. 여자가 가까이 오자 남자는 말을 걸었다.
-아따 뭣 땀시 그라고 꽃을 찍고 그라요? 꽃을 찍어 가믄 보기는 혀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 그랑께 뭣 땀시 그라고 꽃을 찍나 혀서…….
-시간의 기억을 찍는 거랍니다. 쉬운 말로 순간이라고 하죠. 지금 그대와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은 추억이란 곳에서 나오거든요.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추억이라는 영혼의 자양분에 기대서 살아간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사진을 찍는 것도,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 것도, 다 아름다운 순간을 가슴에 담아두고 삶이 버겁거나 힘든 순간에 꺼내보는 것이지요.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멈출 수가 없기에 다시 일어나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일 겁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해가 되셨다면 이번엔 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