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어원
밀가루, 메밀가루 따위에 물을 섞어 반죽으로 만든 상태에서 손이나 기계 등을 이용하여 가늘고 길게 뽑아낸 식품이나 그것을 삶아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음식을 국수라고 한다. 조선 시대 기록에서는 국수가 우리말이라고 하는데, 어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일반화된 국수는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는데, 우리나라 관련 자료는 송나라 서긍(徐兢)이 1123년에 사신으로 왔다가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실린 내용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밀을 적게 심는 관계로 면(麪)의 값이 비싸서 성대한 의례가 아니면 국수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국수가 매우 귀한 음식이어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국수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종실록에는 태종이 서거(逝去) 하자 조문을 위해 온 중국 사신이 국수를 선물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중국, 조선 모두 이것을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국수는 17세기를 지나면서부터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한자 표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는 국수의 어원은 그때까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선 시대의 어떤 기록에도 국수라는 표현의 어원에 해당하는 내용의 기록이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현존하는 자료를 중심으로 국수의 어원을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데, 이것 또한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자료를 찾아보고 정밀하게 분석해 봐도 국수라는 명칭은 이두 표기가 굳어져서 우리말처럼 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순우리말로 보아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이름의 근원을 알 수 없고, 의미를 분석해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데다가 이런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자료에 대한 분석과 음운의 변화 양상 등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검증을 해보고자 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시대 전반기까지 국수는 면(麪)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여러 기록에서 한자로 된 새로운 명칭들이 등장한다. 1670년에 발간된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서는 습면(濕麪)을 ‘국슈’로 번역했고, 1789년에 나온 재물보(才物譜)에는 탕병(湯餠)을 역시 ‘국슈’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서유구(徐有榘)가 182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서는 ‘掬水(국수)’라고 했다. 1819년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는 ‘掬水(국수)’라고 하면서 ‘匊水’는 잘못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밀가루는 ‘진말(眞末-고운 가루)’로 기록하고 있다. 1855년에 조재삼(趙在三)이 저술한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 ‘麴讐(국수)’라고 했다. 한자로 된 이 명칭들이 글자의 차이만 있을 뿐 한결같이 같거나 비슷한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이 명칭들은 모두 앞의 글자와 뒤의 글자가 표시하고자 하는 바가 정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앞의 글자인 匊(움큼 국), 掬(움킬 국), 麴(누룩 국) 등은 모두 국수의 재료가 되는 것이 가루라는 점을 나타낸다. 국수는 밀가루, 메밀가루 등과 같이 가루로 만든 것을 재료로 한다는 뜻이다. 뒤의 글자인 水(물 수), 讐(나란할 수), 鬚(수염 수) 등은 모두 국수의 모양, 혹은 형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재료와 모양을 절묘하게 연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앞의 글자가 지닌 뜻을 보자. 匊과 掬은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움켜서 뜨는 것을 나타낸다. 둘 다 물이나 가루 같은 것들을 손으로 움켜쥐거나 뜬다는 의미이다. 국수라는 표현에 이 글자들을 쓴 이유는 두 손으로 한 번 움켜 뜨는 것으로 가루의 양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형태의 그릇이 없었던 과거에는 밀가루나 쌀가루 등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는 한 움큼, 두 움큼 등으로 그 양을 측정했다. 주로 가정에서 국수 같은 것을 만들 때 식구의 수에 맞추어서 밀가루의 분량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를 움큼으로 가늠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를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술을 만드는 원료인 누룩(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이것은 가루로 만든 밀을 주재료로 하여 발효균을 넣어서 만든다. ‘麴’은 가루로 된 밀을 손으로 움켜 뜬다는 것을 기본적인 뜻으로 한다. 누룩은 밀의 껍질을 완전히 제거하고 갈아 낸 희고 고운 가루가 아니라 껍질을 포함한 거친 형태의 가루를 재료로 하는데, 바로 밀기울이다. 국수보다는 누룩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가루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그런 이유로 하얀 밀가루를 재료로 하여 먹기 좋게 만들어낸 국수의 명칭에 이 글자를 썼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글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수의 한자 표기 뒤에 쓰인 讐(원수 수), 水(물 수), 鬚(수염 수) 등의 글자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讐’는 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서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란하다’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다가 말을 많이 하면 오해가 생겨 원한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원수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麴讐’를 누룩의 원수라고 해서는 안 된다. ‘水’는 물이 흐르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세 갈래의 줄이 나란히 있는 모양에서 시작되었다. 물줄기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자 역시 가늘고 나란히 있는 국수의 모양을 나타내기에 아주 적합 글자가 된다.
‘鬚’는 수염, 혹은 술(장식으로 단 여러 가닥의 실) 등의 뜻을 기본으로 하는데, 줄이나 실처럼 가느다란 것 여러 개가 위에서 아래로 나란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지칭한다. 틀을 통해 나오는 국수가 나란히 매달려 있는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 이 글자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국수틀을 통해 아래로 늘어지면서 매달려 나오는 국수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인 것이다. 국수의 한자 표기에 대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발상은 이처럼 기발했다.
우리말로 보이는 국수라는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면 한자 표기가 얼마나 합당한지 등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이는데, 이제부터 국수라는 표현의 어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도경�에서는 절에서 국수를 판다고 했으니 당시 사회에서는 국수틀을 이용해 면발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둥글게 반죽한 밀가루를 눌러서 가늘고 긴 형태의 면발을 빼내는 국수틀은 반죽을 넣는 분통(粉桶)과 그것에 넣어서 누르는 누름틀(공이)로 이루어져 있다. 반죽이 들어 있는 분통을 공이로 누르면 국수 가락이 아래로 빠져나오는 방식이다. 둥근 모양으로 된 분통의 바닥은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쇠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 넣은 반죽이 누르는 힘을 받아 가느다랗고 긴 모양의 국수 가락이 되어 줄줄이, 그리고 나란히 아래로 나온다. 그래서 예로부터 ‘국수를 누른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국수는 세 가지 요소가 핵심으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가루로 만든 반죽이며, 둘째는 그것을 국수로 만드는 도구 혹은 방법이다. 셋째는 국수틀을 통해 나란히 드리워져서 나오는 가락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 국수라는 말의 어원을 분석해 볼 수 있는데, ‘구멍’과 ‘드리(워진)’가 결합한 형태가 이렇게 변화한 것으로 봄이 가장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수의 시작은 밀, 메밀을 갈아서 만든 가루이므로 논리적, 이론적으로는 가루가 국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것은 잘 인식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반죽으로 만들어진 상태로부터 국수의 제작 과정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죽은 분통을 통할 때만 국수의 형태를 갖출 수 있으므로 그것에 있는 작은 구멍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은 국수가 구멍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이 ‘국’이라는 말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멍은 전국에서 부르는 말이 매우 많은데, ‘구무’, ‘굼’, ‘굼기’, ‘궁기’ 등이 오래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받침으로 사용되는 ㅁ, ㄴ, ㅇ은 언제든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데, ‘구무’에서 ‘굼’으로 되고, ‘굼기’로 되었다가 다시 ‘궁기’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ㅇ’은 음가가 약하거나 아예 없는 글자이므로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음을 만나면 그것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궁기’는 ‘궁ㄱ’의 형태로 되었다가 ‘ㄱ’이 앞으로 올라붙어 ‘ㅇ’을 밀어내고 받침으로 되면서 ‘국’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보이는 ‘국’에 대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가루가 국수의 본질적인 특성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하여 ‘두 손으로 움켜서 뜬다’라는 뜻을 가진 ‘掬’이나 가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던 누룩을 의미하는 ‘麴’ 등으로 표기했다. 이런 글자들이 국수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국수틀에 있는 분통의 작은 구멍을 통해 국수가 나오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이 즉물적으로 붙인 ‘국’이라는 말이 정서적으로는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반 사람들은 분통을 통해 나오는 국수의 모양을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것에 있는 구멍을 더 중요시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매달려 있는 국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鬚, 水, 讐 등인데, 모양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합당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자를 잘 모르거나 생활 속에서 별로 쓰지 않았던 일반 사람들은 국수의 모양을 우리말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이 쓴 글자의 깊은 뜻을 알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수의 ‘수’가 어떤 형태의 말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써왔던 이두(吏讀) 표기를 통해 이것을 나타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아주 오래 전인 고구려, 신라 시대부터 이두라는 표기 방법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매달려 있는 것을 표현하는 우리말에 ‘드리다(드리우다)’가 있는데, 여기에서 어간(語幹)을 취해 이두로 표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리다(드리우다)’의 어간은 ‘드리’인데, 이것을 이두 표기로 하면 ‘垂(드리울 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드리다(드리우다)’는 ‘한쪽이 위에 고정된 줄 따위가 아래로 내려오다, 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인데, 국수틀의 분통에 난 구멍을 통해 매달려 나오는 모양을 나타내기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이것을 이두 표기로 하면 ‘垂’가 되는데, 뜻을 가지고 온 차자표기(訓借)이다.
밀가루를 사용하여 가는 면발을 만든 다음 그것을 익혀 먹는 음식인 국수는 순우리말인 ‘구무드리’였다가 이두 표기의 과정을 거쳐 ‘垂’로 되었고, 이것이 우리말처럼 굳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대부들에 의해 한자로 기록되기 시작하면서 麴讐, 掬水, 麴鬚와 같은 다양한 표기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국수라는 말이 이두 표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어떤 기록에도 해당하는 자료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두 표기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글쓴이의 주장이라는 점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