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워낙 잘 차단되는 숙소 창문 때문에 눈을 떴을 땐 아직 밤인 줄 알았다. 정작 시계를 보니 아침 8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밝은 빛이 방안 가득히 들어와 눈이 부신채로 기지개를 켰다. 혹시 갑작스러운 고된 여행에 몸살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근육통도 없었다. 단지 페달을 밟느라 쏠린 엄지발톱이 조금 쑤시고 멍든 무릎이 모기 물린 것처럼 간지러울 뿐이었다.
9시 반으로 예상했던 출발은 나의 늦장 탓에 10가 넘어서야 가능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화창한 날씨가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젯밤 음산했던 시내거리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왠지 오늘 군산까지 잘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백제보-익산성당포구인증센터
다시 종주를 이어나가게 된 부여 어느 공원에는 게이트볼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처음엔 그 평화로움에 동요되어 동네 산책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 공원을 벗어났을 땐 삭막한 갈대밭이 이어졌고 그 길을 구불구불 따라 달렸다. 중간에 뒤따라온 자전거들은 여지없이 나를 추월해 갔다. 그들의 발놀림은 급함이 없이 한 두 번만 밟아도 쭉쭉 나아갔다. 그에 비해 나는 쉼 없이 발을 놀려 대는대도 그들과의 거리는 점차 멀어졌다. 그럴 때마다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서 따라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목적지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것 같아서 쓸데없는 승부욕은 버리기로 했다.
익산으로 가는 길
갈대밭이 지루해지려던 참에 길은 산으로, 그리고 논밭 근처 언덕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제법 마주 오는 사람들과도 여유롭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근처에 살면서 지나쳤던 길들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이 구간 길에는 일반 자전거 말고도 다양한 생김새의 탈것들이 지나갔는데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지루함이 없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전거
강경을 지날 땐 어쩌다 마실 나오신 할아버지 두 분과 속도가 맞아 같이 가게 되었다. 그분들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암묵적인 경쟁자가 되어 주시기도 하고, 중간에 길을 막아놓은 곳에서는 어떻게 우회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 두 분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바람개비가 끝없이 세워져 있는 길이 이어졌다.
익산 바람개비길은 처음엔 조금 신기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이길만 벗어나면 인증센터가 나올 것 같은데, 삼십 분이 다돼 가도록 같은 길이 이어졌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던 차에 인증센터 안내 표지판이 나타났다. 나는 표지판을 따라 직진만 하던 자전거를 오른편으로 꺾었다.
"와....."
길에 들어서자 나는 마치 깜짝 이벤트를 받은 사람처럼 벙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것 만 같은 벚꽃나무가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서 눈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조급하던 내 페달은 점점 느려져 결국 멈추었고,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내려걸었다. 오면서 질리도록 보았던 바람개비들이 나무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벚꽃과 함께 있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장면의 한 조각이 되었다.
눈이 내린 것만 같은 벚꽃길
벚꽃길에 아쉬움만을 남겨두고 익산성당포구인증센터에 도착했을 때다. 인증을 받으러 온 주변사람들한테 민망할 정도로 배가 쉼 없이 꼬르륵거렸다. 나는 울어대는 배를 달래려고 급하게 근처 밥 먹을 때를 찾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슈퍼 겸 식당을 하는 곳에서 청국장을 시켜 앉았다.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가 음식을 가져다주시면서 말을 걸었다.
"혼자 자전거 타는 거예요? 무섭지 않아요? 왠지 심심할 것도 같아."
아주머니의 물음은 전부 맞다. 어제 해 질 녘 공주에서 부여까지는 좀 무서웠고 혼자라 좀 심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난 이 도전이 재밌었다. 스탬프 모으는 것도 그렇고 여행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깐. 그것을 빼고도 새로운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아주머니께는 단지 "재밌어요."라는 말로 이 긴 설명을 대신했다.
익산성당포구-금강하굿둑
밥을 먹었으니 열심히 달려 보라는 듯 평지만 안내하던 길이 산동네로 이어졌다. 언덕길을 숨을 헐떡이며 오르니 더 큰 오르막이 나타났고, 좀 전에 먹은 밥이 올라올 것 같아 잠깐 내려 쉬고 있었다. 뒤에서 자전거를 탄 남녀 둘이 아까 나를 봤다며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그제야 그들은 언덕을 보았는지 절망스럽게 욕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그 가파른 언덕을 끝까지 내리지 않고 넘는 걸 보니 정말 대단했다. 반면 나는 혀를 내두르며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몇 번 자전거를 내렸다 타기를 반복했고 울창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처음엔 평평한가 싶던 길이 이번엔 내리막이 계속되어 혹여 낭떠러지로 튕겨 쳐 나가진 않을까 온몸에 힘을 꽉 주어야 했다.
걸어서 언덕을 오르는 중
산을 넘자 벚꽃길이 계속되었다. 이제는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벚꽃을 보러 자전거를 끌고 나온 사람들도 보이고 연인끼리 풀밭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달릴수록 벚꽃이 만개한 강가에서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아서인지 자전거의 속도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입고 있는 바람막이가 쉴 새 없이 펄럭이고 도로를 질서 없이 걸어 다니는 행인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뛰어드는 아이와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강이 바다와 만날 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입술은 메말라 부르텄고 눈에는 먼지가 들어가 눈물이 찔끔 흘렀다. 종점까지 10km도 안 남았을 무렵, 평지에서도 계속 오르막을 올라가는 기분으로 뻑뻑해진 페달을 밟아 나갔다. 어느샌가 관광객들이 사라지고 다시 종주를 이어가는 사람들만이 길에 남아 있었다. 이 짧은 거리가 지금까지 왔던 나머지 거리보다도 더 고되게 느껴졌다. '만약 이 길을 한 번 더 갔다 오라고 한다면?' 나는 아찔한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분간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종점까지 5km, 3km, 500mm. 바로 오른편에 있어 하마터면 인증센터를 지나칠 뻔했다. 녹이 슬어 다소 허름해 보이는 금강하굿둑 인증센터에서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 감격스러운 동시에 이게 끝인가 싶어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길이 끊긴 것 마냥 다음엔 무얼 해야 하나 한참을 방황하다 부모님의 차가 도착했다. 부모님은 내 추천으로 아까 지나쳐온 익산성당포구에서 데이트를 하고 오시는 길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인데 어느 때보다 반갑게 느껴졌다. 우린 자전거를 싣고 근처 카페에 들러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완주의 순간들
"너희 아빠는 정말 낭만이 없어."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로 한껏 꾸민 엄마와 이를 낯설어하는 아빠는 한참이나 티격태격이었다. 이는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이어졌고, 나는 중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참 깔깔 웃었다. 그러다 내 시선이 무심코 옆에 접혀 실린 자전거로 향했다. 나는 슬쩍 웃어 보였다. 정말 느려터지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바위 굴러가듯 하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제대로 정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