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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l 01. 2024

9장. 노을

노을과 마주한 시간

치앙마이 장기 여행자들이 모이면 항상 물어보는 것이 있다.

"빠이(Pai) 가실 거예요?"

나는 항상 그 질문에 애매한, 거의 부정에 가까운 답을 하곤 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빠이는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할 정도로 치앙마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곳이다. 오픈톡방에서는 매일같이 빠이에 대한 찬양이 이어져 관심도 없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갖게 된다. 반면, 나의 동행(7장)이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오히려 빠이에 대한 흥미를 가졌다가도 잃기도 한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기에 굳이 시간을 내서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당시 묵었던 숙소에 대한 극심한 공포감과 '올 거면 하루빨리 와야 한다'(당시 화전이 시작되고 있어 연기가 많이 올라오고 공기가 탁해지고 있었다)는 동행의 호들갑에 당연하게 빠이로 향했다.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거리는 차로 편도 3시간 정도다. 이동을 하는 동안 나는 그제야 빠이를 찾아봤다. '빠이캐넌' '빠이일출' '빠이선셋' '빠이온천' 자연 관광에 가까운 빠이 관련 검색어에 나는 잠정적으로 '빠이는 자연을 보는 곳이구나'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제야 조용히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드디어 빠이에 도착했다. 치앙마이와 비교하면 빠이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치앙마이보다 훨씬 평화롭고 한가한 분위기에 나는 이곳에 금방 매료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


메인 거리(여행자 거리)로 나서자마자 마주한 맨발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 거의 반 나체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 영화에서 볼법한 사람들의 정체불명 스타일... 뭐야, 여기 완전 '히피 마을'이잖아. 반 나체에 맨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가는 눈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하필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튜브 위에 몸을 맡기고 강물을 따라 떠내려오는 수십 명의 서양인들의 모습은 영화 '미드소마'를 보고 있는 듯한 기괴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알고 보니 튜빙투어라는 튜빙 후 친목의 시간을 갖는 관광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품고 있는 빠이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없고 그저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조용히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묘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엇하나 평범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모아보니 이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빠이에 와서야 빠이에 대한 관심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빠이는 어떤 곳일까?



빠이에 올 거면 빨리 오라며 나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동행은 치앙마이에서 그룹투어로 만난 동생이었다. 그 동행은 내가 빠이에 도착한 날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냥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주지만, 돌이켜보면 이 친구가 없었다면 빠이에서 저녁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다. 그 이유는, 빠이의 밤은 낮과는 180도 달랐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니 빠이의 메인 거리에는 야시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사람들과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메인 거리가 아니어도 어느 골목이든 술과 음악(그리고 대마까지)이 자리했고, (아마도) 히피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마를 즐겼다. 낮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처음 겪어 보는 분위기에 있다 보니 나는 새삼 동양인 여자 혼자라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빠이에 오면 한국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0명 중 1명도 찾기 어려운 것이 동양인이었긴 때문이다.


낮과 밤이 이토록 다른 빠이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낮에도 밤에도, 나는 어느 곳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들 좋다고 하는 빠이를 나만 좋아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그렇게 인기가 많아?'라며 트렌드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멀뚱멀뚱 빠이를 지켜만 봤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종일 빠이가 어색했던 것은 아니다. 하루 중 빠이를 맘 편히 좋아했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노을이 지는 시간. 낮과 밤의 사이.

그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며 오로지 해가 지는 순간에 집중한다. 차분해진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함박미소를 띠며 들떠 있다. 고요하면서도 활발한 분위기. 그 시간만큼은 나도 빠이에 빠져 마음속으로 굉장한 호들갑을 부리고 있었다.


사실, 빠이에서의 노을을 더욱 특별히 여기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예쁜 오렌지색과 붉은색 사이 어디쯤에서 빛을 내뿜는 빠이의 노을에서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붉은색(주황빛)을 느끼지 못한다는 그가 문득 떠올랐고 그가 보는 노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기에 그 순간, 노을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특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노을이 완전히 지고 나니, 곧 긴 밤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동행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시끌 버쩍한 식당에서 만났다.


"빠이 어때?"

"음... 표현하기 좀 어려워."


애매하게 시작해 모든 것이 애매했던 빠이 여행.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때 그 노을은 정말 좋았어."


어쩌면 빠이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솔직한 감정과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은 노을이 지던 딱 그 시간만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빠이를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고, 그저 노을을 바라봤던 그 순간만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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