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 Agua(물) 전쟁을 선포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능력치

by 별나

이 공간 안에는 내 한숨소리, 세탁기가 살려달라고 삑삑 대는 소리뿐이다.

삑삑 소리치는 세탁기를 바라보는 내 심정이라면 참담하다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고생하는 세탁기를 걱정해 줄 틈도 없이 난 폭발해 버렸다.


빨래를 하는 도중 물이 끊겼다.

그것도 두 번이나.

세탁기 속 빨래뭉치는 벌써 2번이나 세제를 먹고 물은 그보다 더 잔뜩 먹었다.

첫 번째 빨래를 돌리고 외출을 했다.

물 수급이 불안정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이 집은 물이 나올 때면 거의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빨래를 돌리면 항상 끝까지 완료됐었기에 괜찮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외출 후 집에 돌아오니 세탁기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고 물 사이사이 빨래가 둥둥 떠있는 채로 날 맞이하고 있었다.

빨래를 하던 도중 물이 끊겨 세탁기가 멈춰버린 것이다.

하지만 또 물이 잘 나오길래 곧바로 다시 처음부터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내가 쓰는 세탁기는 한국제품이 아니고, 빨래를 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돌리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러다 또 잘 나오던 물이 끊겨버린 것이다.

지금 세탁기에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

집에 모아둔 물들을 다 부어버리면 빨래를 완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놓은 물이 많았기에 20분 정도면 내가 이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냅다 받아놓은 물들을 부어버렸다.

세탁기는 내 생각보다 물을 많이 먹었지만, 물이 끊기다 나왔다 했기 때문에 다시 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고 나는 물이 많았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을 냅다 들이붓는 노동을 반복한 결과 다시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돌아가는 세탁기를 쳐다보며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오직 세탁을 끝까지 마치겠다는 목표 하나만 보일 뿐이었다.

열심히 일을 하던 세탁기는 금세 물을 뱉어냈고 다시 물을 달라는 삑삑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그런데 웬걸 물이 끊기다 나왔다 반복했던 게 이제는 아얘 나오지 않는다.

완전 단수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고민, "이 짓을 더 지속할지 말지..."

이제 남은 물이라곤 마실 물 뿐이었지만, 이 기계를 끝까지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빨래를 꼭 끝내라리는 집념으로 결국 마실물까지 전부 부어버리는 광기를 선보였다.

이제 집에 남은 물은 한 방울도 없다.

다 부어버리고도 물이 모자라서 7L짜리 생수를 3번이나 사와 죄다 부어버렸다.

이번엔 되겠지, 이젠 될 거야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왔다 갔다 무거운 물을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미친 듯이 물을 부어버린 나는 결국 방전이 되었다.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보니 미친 짓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에 5일은 물이 끊겼던 우리 집.

자다가도 물소리가 들리면 뛰쳐나가서 물을 받아뒀고 밀린 설거지와 집안일을 빠르게 해결했다.

알게 모르게 쌓여버린 스트레스가 꽤 많았는지 터져버렸고 그렇게 물과의 전쟁을 치러버렸다.

세탁기에 물을 부어버린 후 널브러진 빈 물 통


바닥에 널브러진 물통들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분풀이의 대가는 참혹했다.

이 전쟁에서 진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외면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빨래를 널었다.

마실 물을 사러 갈 힘도 없는 나는 그대로 누워 한동안 몸을 단 1cm도 움직이지 않았다.




집을 구할 때 선배단원이 사는 집의 윗집에 내게는 1등 선택지였다.

엄청 큰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단점이 있지만, 사무실과 가까웠고 집주인이 좋았으며 집 크기도 혼자 살기 딱 적당했다.

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수 때문이었다.

수압도 약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물이 끊기는 집이었다.


지금 사는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1층에 물탱크가 있었고 수압이 강했다.

하지만 세상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단수가 일어나는 곳은 우리 집이었다.

일주일에 5일은 물이 끊겼지만, 하루 온종일 끊기는 것은 아니었고 몇 시간씩 랜덤으로 끊겼다.

하루 온종일 끊긴 날은 총 3일 정도에 불과하여 견딜만하다고 나를 세뇌시키며 그렇게 버텼다.

그래도 가만히 물 나오는 것만 기다린 것은 아니다.

주변 상가 주인들, 집주인, 집주인 가족 등 물어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전부 물이 끊기는 원인을 물어보고 다녔다.

그리고 언제 다시 물이 나오는 지도 매일 물어봤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유난 떠는 한국인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원래가 물이 자주 끊기는 곳이고 현지인들은 그러려니 하며 불편을 감수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나마 얻은 단서라고는 우리 집이 살짝 위쪽에 위치해 있어 물을 끌어오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 뿐이었다.


결국 집주인에게 물탱크가 작동이 되는 게 맞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물이 없다는 것이다.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쩐지 물이 너무 자주 끊긴다 싶었는데 진짜 작동이 안 되는 물탱크였다니... 1층에 물탱크를 마주할 때마다 배신감이 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나는 집주인에게 물탱크를 설치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물 때문에 유난 떠는 한국인이 맞지만, 불편함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파격 선언 후 5일 차, 갑자기 천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작업자들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는 2일간 진행되었고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지 1주일 만에 물탱크가 설치되었다.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물이 끊기는 집에서 고생했는데, 집주인에게 나간다고 선언하니 빠르게 물탱크를 설치해 준 것에 감사함과 동시에 나를 돈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물이 잘 나와서 좋았지만, 집주인에게 실망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한국만큼 물이 항상 원활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단수는 잘 되지 않는다.

물이 나를 선택해야 쓸 수 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제는 내가 원할 때 물을 쓸 수 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물의 소중함,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여기는 볼리비아니까."로 모든 화는 잠재워졌다.

저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되었다.

애초에 불편할 것을 각오하고 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견디고 해결하며 인내심을 키웠고 또 금세 생존력이 업그레이드되었다.


눈에 보이는 생존력 상승이라고 한다면 바로 생수통으로 샤워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

처음에는 물이 잘 나오는 동기 단원의 집에 가서 씻었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쉬는데 찾아가서 씻는다고 하기도 미안했고 가까운 거리지만 귀찮기도 했다.

결국 쌓아둔 생수로 씻는 방법을 택했다.

집에는 기본적으로 생수를 8통 이상을 마련해 뒀다.

언제 물이 끊길지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물을 항상 쌓아두는 것이 습관이 됐기 때문이다.


생수로 씻을 때는 2L짜리 생수병이 3개 필요하다.

2L 생수여야 하는 이유는 한 손으로 생수병을 들어 머리 위까지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에는 3L짜리 생수도 있는데 3L는 내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웠다.

한 손으로 생수병을 들고 머리 쪽으로 물을 쫙 부으면 온몸에 물기가 전달됨과 동시에 차가운 기운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한두 번 반복하면 찬기의 소름은 사라지고 시원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을 온몸에 적신 후에는 샴푸와 비누칠을 하고 다시 물을 붓는다.

그렇게 비누기를 닦아내길 반복하면 총 6L만으로도 몸을 씻을 수 있다.

처음에는 너무 차갑고 이렇게 씻어야만 한다는 현실에 대한 현타가 몰려왔다.

하지만 곧 적응했고 샤워기의 따뜻한 물로 씻을 때보다 개운함이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그마저 물 쓰는 양이 줄어 지금은 5L만으로도 씻을 수 있다.


나는 볼리비아 꼬로이꼬에 살면서 2L짜리 생수 3통만 있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개운하게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물을 통해 배웠다.

내가 평생 살아온 한국에서는 물이 끊기는 일이 잘 없었을뿐더러 가끔 단수가 되면 몇 주 전부터 미리 알려줬기에 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물이라는 것을 항상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내가 쓰고 싶을 때 쓰는 게 당연한 것.

하지만 단수가 일상인 이곳에서 내가 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물이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험을 했다.

물도, 전기도, 가스도 마음껏 쓸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됐고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불편함을 견뎌냈다는 것에 나는 큰 뿌듯함을 느낀다.

경험이라는 선물은 나를 더 성장시켰다.


밀키스 색의 물

가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꼬로이꼬에는 흙탕물이 나온다.

또 어쩔 때는 밀키스 같은 물이 나온다.

겨우 이런 것으로 불평불만 따위는 없다.

그저 물이 있음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Agua전쟁에 패자인 줄 알았던 나는 승리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5. 긍정회로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