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촛불, 큰 소망
난 어렸을 적부터 줄곧 긍정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단란했고 대화가 많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탓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내가 살면서 본 모든 사람 중에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해맑은 아이로 자랐고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사람으로 성장했다.
나를 표현하는 단어에는 항상 긍정이라는 키워드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는 마치 그것이 내 명패인 것 마냥 떠들고 다녔다.
2022년 한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나는 한참을 울었다.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았던 아빠, 그 원인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암 말기라는 천척벽력 같은 소리.
말기는 무조건 사망에 이른다는 편견이 나를 지배했다.
쌀쌀한 여름 공기를 들이키며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아 얼굴이 탱탱 부어라 몇 시간을 울었다.
아직 학생인 동생에게 비밀로 한 채, 그리고 아빠에게도 비밀인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시작된 항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이 계속 떠올랐다.
암병동에서 일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쓴 에세이로 긍정적인 사람일수록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내용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빠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아빠는 무척이나 힘들어하셨지만, 또 잘 극복하시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괜찮다며, 이 항암이 끝나면 몸짱이 될 거라는 둥 농담을 던져댔고 내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머리카락은 전부 빠졌고 송충이 눈썹마저 빠져버려 눈썹 그리는 방법을 알려줘야 했지만, 그마저도 전부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그리고 2022년 말 나는 그렇게 볼리비아살이를 시작했다.
볼리비아에 오기 직전 아빠의 항암이 끝났고 건강을 회복하는 중이었기에 다 잘될 줄로만 알았다.
모든 게 다 긍정적인 우리 가족의 기운 덕분이라고...
그렇게 나는 새로운 경험을 시작했다.
불안함, 나태함, 불편함, 갈등, 아픔 많은 감정을 느꼈지만, 대부분의 시간이 행복했다.
2023년 3월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비빔밥을 맛있게 해먹은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은 아빠의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저녁은 뭐 먹지 하는 사소한 고민만이 머릿속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재발'.
그리고 이번 항암은 더 힘들 것이며 입원까지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의 뇌는 일시정지 되었다.
불편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18살 동생과 천방지축 강아지, 그리고 아픈 우리 아빠를 케어할 엄마가 걱정되었다.
이러다가 엄마의 건강까지 나빠질까 두렵고 앞으로 더 힘들어질 아빠가 걱정됐다.
이대로 이 생활을 접고 가족에게 달려가야 하나 싶었지만, 순간 멈칫했다.
이곳 생활을 잘 마치고 싶은 욕심에 "엄마, 힘들면 내가 한국으로 갈게."라는 말을 삼켰버렸다.
이기적인 내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아빠가 아픈데도 나는 도움하나 주지 못한다.
바쁜 동생 학원 가기 전에 밥을 챙겨줄 수도 없고, 집 청소 한 번을 해줄 수도, 강아지 대소변을 치워줄 수도 없다.
지구반대편에 사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원망스러웠다.
이기적인 나를 향한 원망의 화살촉이 심장을 찌르듯 아팠다.
엄마와의 전화를 끝내고 이불을 돌돌 말아 뒤집어쓴 채 눈물을 훔쳤다.
아무에게도 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공간은 나 혼자고 아무도 보지 않을 걸 알지만, 더 깊이 숨어 울고 싶었다.
낮이 밝으면 아무 일도, 걱정도 없는 듯 밝게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이 모든 상황을 망각하고 행복을 느낄 때면 뭔가 죄를 짓는 감정에 괴로웠다.
'아빠는 괴로울 텐데 나... 행복해도 될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비실비실 웃어대도 될까?'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빠가 내 생각을 읽는다면 더 속상해하겠지.'
그래서 '즐거울 때는 열심히 즐기고 슬플 때는 열심히 울자.'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행복하다가도 문득 드는 답답한 생각들과 일을 하다가도 어지러운 마음들이 나를 지배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주어진 나의 몫을 감당하며 열심히 살아내 볼 것이다
볼리비아의 유명 관광지 티티카카호수 근처에 사람들의 소원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 있다.
건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수많은 초들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들이 전부 사람들의 바람이라 그런지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얀색은 건강을 상징한다고 하여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초를 구매했다.
초를 켜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구석진 자리로 옮겨 아무도 모르게 소원을 빌었다.
"아빠가 괜찮아 지기를..."
내 바람이 지구 반대편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잘 견뎌보자.
사랑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