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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Nov 17. 2024

 "존재론이 들려주는 세계"

논문집 : A World Told by Ontology  공유

 #인문 #자연과학논문 #휴먼사이언스 #교육


생소할 수 있는 ‘존재론’이란 사실 실질적이고 소박한 뜻입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어떤 원리로 ‘자신이 자기가 됨’을 이루고 있느냐에 대한 기본적 이해입니다. 자연은 이것에 관한 최고의 교사로서, 138억 년의 근본적이며 실천적 지혜를 단련해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원이므로 자연 원리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 통하는 깊이와 넓이를 가집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비전입니다.

 이 자연의 지혜를 실증적 방법으로 엄밀하게 연구한 과학의 으뜸은 ‘물리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은 직관적인 간결함과 정밀한 논리를 함께 가집니다. 이러한 물리학의 발전은 문명의 발전과 직결됩니다. 물리학적 이해가 인간 지혜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물리학은 계속 발전되어야 하며, 과학은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저녁 동네 카페의 창가에 앉아 지난 2년을 생각해 본다.

2년 전 꼭 이때쯤 챗GPT라는 놈이 세상에 처음 나왔다. '패턴분석'으로 시작되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논리가 풍부한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패턴은 우리에게 '카테고리'와 같은 익숙한 개념이지만 훨씬 간결하다. 사실 우리의 인식은 그렇게 패턴 분석으로 시작한다. AI가 인간처럼 패턴을 빨리 찾도록 하기 위해서는 매우 고급한 고등 수학이 동원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사고 과정에 근접하게 모방한 내용이라니 놀랍지 않는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AI보다 더 복잡하고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공지능은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값비싼 장비와 전기를 들여서 엄청난 빅데이터를 정제해야 한다. 한 가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을 다시 돌려야 답을 얻는다. 인간에 비하면 이런 비능률은 세상 천지에 없다. 엔비디아 NVIDIA 주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처음에 인공지능은 빅데이터를 돌리며 기계적으로 꾸역꾸역 답을 만들어냈다. 추론은 능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예리한 맛은 없지만 놀랍도록 좋아졌다. 더 나는 방법은 있다. 인간의 생각법을 더 모방하는 일이다. 인공지능의 꿈은 사람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자연 원리를 이해할수록 인간이 가진 태생적 능력과 잠재력의  풍부한 잠재력에 경탄하게 된다. 누구나 진실로 존경스럽다.

데이터만 있으면 온갖 상상과 추론의 날개를 펴는 인간에 비하면 인공지능은 여전히 창발성은 부족하다.


한편 늘 경계해야 하는 일이지만, 인간은 자기 생각에 발목 잡히기 일쑤라는 사실이다. 관념에 습관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무엇에 자주 의지한다는 것은 홀로 서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미물로 간주하는 나비와 잠자리는 인간에 비해선 훨씬 어른스럽다. 야생의 고치에서 나와 젖은 날개를 말리는 순간부터 전 방위적으로 혼신을 다해 생존의 감각을 펼친다. 이 작은 미물은 결코 간단치 않은 감각으로 홀로 세상을 당당히 누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울 때다. 하루에 최소한 10번 이상 넘어졌다 일어나며 거의 열 달 동안 걸음마를 배운다. 그러니까 3,000번 이상은 족히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마침내 홀로 설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이 조건 없는 용기'는 고귀한 것이었다. 넘어지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전체가 앎의 과정이었다. 어렵다는 한국어를 책도 없이 배웠다. 우리는 모두 한때 이러한 기적을 이룬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독특하게 문명이라는 게 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를 끝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상은 습관처럼 문명의 세례를 퍼붓는다. 여기에 앞장서는 것은 부모들의 애정 어린 사랑이다. 사회는 이렇게 무언의 압력을 주고 부모는 그것을 아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말했지만, 이러한 '선행 학습'은 유감스럽게도 온갖 편견들의 집합이다. 그냥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지고 코피가 나더라도 놔두었어야 했었다. 처음에 잠시 인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온몸으로 배워야 크게 배운다.

진정한 앎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체득'이었다. 몸으로 배울 때 넓어지고 커지며 더욱 튼튼해진다. 여기서 '주관성'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모든 종류의 선행학습은 영원한 굴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경계해야 하는 비능률로 이끄는 유혹이다.


손자나 손녀가 생기거든 처음부터 스스로 주관성을 가지도록 키우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럴 때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며 세상을 향해 주인의 날개를 힘껏 펼칠 것이다. 처음엔 본인이 좀 고생하고 보는 어른이 안쓰럽더라도, 그 후론 학습 속도와 능률은 훨씬 빨라지고 자기 주도적으로 된다. 자기 인생도 주인이 되어 살게 된다.

어른들 역시 걸음마를 배우던 겁 없던 시절의 순수와 호기로움을 마음 한 켠에 소중히 두어야 한다고 본다.


감사합니다.


공유파일    http://udynamics.net/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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