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인간, 그 나약한 존재에게 신이 바라는 것은...

by 레몬 브리

『우리들의 하나님』,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욕망


신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권전생 선생님은 오래전 그 물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깃불 하나 없이 석유램프만 켜진 예배당, 차가운 마룻바닥 위. 그가 기억하던 그 자리, 그 적막 속엔 벅찬 감동,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감동과 성스러움은 교회 안에서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신앙은 그때와 달리 많이 변질되었고, 하나님의 이름 아래 탐욕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출세, 권력, 돈… 세속의 욕망을 좇는 자들은 성스러운 얼굴로 위장하고 군림한다. 가난은 믿음 없음이 되었고, 고통은 기도 부족의 결과가 되었다.

2천 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 그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예수를 따른다고 말했던 자들이 예수를 배반했고, 가장 많이 괴롭혀왔다. 권정생 선생님이 생각하는 신은, 기독교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얄팍한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방식으로 온 세상을 돌보아 왔다. 교회가 있든 없든, 신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 묵묵히 우주를 다스려왔다.

자연 만물 속에 신의 본성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로마서 1장 20절

그러나 지금의 신앙은 자연 만물이 말하는 신의 섭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기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의 틀에 신을 가두려 한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신의 섭리까지 비틀려한다. 결국 신의 뜻이라면서 자신의 욕망을 말한다.


세상 어떤 것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너를 더 해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토마스 아 켐피스

인간은 나약하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기애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붙잡게 되는 성공도 돈도, 명예도 결국은 모두 바스러질 것들.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신의 섭리 안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권정생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세상의 성공도, 명예도, 업적도 기웃거리지 않았던 분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신의 마음에 가까워진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신을 사유화한 자들


우리는 너의 편이 아니라 그의 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밀이란 말이다!
(중략)
정확히 8세기 전에 우리는 네가 격노하면서 그에게서 거부했던 것, 그가 지상의 모든 왕국들을 너에게 보여 주면서 너에게 제안한 마지막 선물을 취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 대심문관의 발언

대심문관인 추기경은, 조용히 다시 나타나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자신들의 체제와 권력을 위협하자, 예수를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방적인 자기변명과도 같은 논리를 펼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교회에 갖다 바쳤노라고. 그러니 인간을 지배할 자격은 오직 우리에게 있다고. 결국, 섬뜩한 본색을 드러내며 소름 끼치도록 정직한 고백을 한다. 우리는 예수의 편이 아니라 사탄의 편이라고. 대심문관의 인용된 발언처럼 교회는 사탄이 제안한 세상과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아들이고 선택했다. 그런 교회는 표면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예수와 대적한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선택 자유를 빼앗고, 통제하려는 '세속권력'을 쥐게 된다.


이 서사시의 시대적인 무대는 16세기. 대심문관의 이러한 고백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사람들을 선동하고, "하나님 꼼짝 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와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신을 자신의 사유물쯤으로 끌어내린다. 헌금으로 믿음의 척도를 재단하는 자들. 비가 그친 것도 하느님이 돈을 젖지 않게 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헌금이 신의 뜻이라 한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은 지금, 꽤 능숙하게 그리고 부끄러움 없이 신의 이름을 팔아 추악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운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이 절망적인 풍경 앞에서, 나는 묻는다.

신은 이 땅의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



죽음을 기억하라


'인간의 일'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하는 바이다. 첫째,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둘째, 메멘토 모리,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이응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이 허락한 결정적인 공정함.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명확하고 냉정한 진실. 결국 인간은 모두 나약한 존재로, 신 앞에 선다. 성자든 악인이든, 그 마음의 뿌리는 다르지 않다. 양심 없이 욕망에 무릎을 꿇느냐, 양심으로 끝끝내 버티느냐, 그 차이가 인간을 가른다.

인간은 모두, 신의 거대한 공정 앞에서, 결국 한 줌의 흙이 된다.

그럼에도 신은 여전히 나약한 우리 곁에 있다.

회개조차 없는 가버나움 같은 도시에서도, 석유램프 아래 무릎 꿇은 나약한 순례자의 숨결 안에서도 신은 묵묵히 함께 한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난다.



고립이 아닌 연결, 그 안에 구원이 있다


인간은 약해서 혼자서는 쉽게 무너진다. 쉽게 두려움에 잠식된다. 하지만, 서로를 마주하고,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알아볼 때, 서로 공감하며 연결될 때, 비로소 신이 이 땅에서 바라는 '인간'이 된다.

손 내밀어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생각할 때, 별거 아닌 파 한 뿌리라도 건넬 때, 그곳에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 그리고 그들의 연대. 그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갖고 있던 구원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고립이 아닌 연결, 두려움이 아닌 사랑. 그 안에 구원이 있다. 그 안에, 신이 바라는 인간이 있다.


서로에게 기대고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행복이란 결국,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속에서 자라나는지도 모른다.

고립이 아닌 연결, 단절이 아닌 연대.

영화 <가버나움>의 마지막 장면.
자인이 신분증 사진을 찍으며 지어 보였던 그 해맑은 미소가 떠오른다.
사는 것이 지옥 같았던 아이의 얼굴에 피어난 그 웃음은, 연결이 만들어낸 기적의 얼굴이었다.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잘 연결되는 것. 그곳에서 기적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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