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지옥에서 피어난 기적의 얼굴

영화 <가버나움> 감독 나딘 라바키

by 레몬 브리

배우가 아닌, 삶이 연기한 영화

이 영화는 레바논 출신의 감독 나딘 라바키(Nadine Labaki)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이다(2018). 그리고 몇 가지 점에서 기존 흥행 영화와는 뚜렷이 다른 결을 지닌다.

하나, 배우들의 대사가 영어가 아니다. 아랍어이다.

종종 '제작언어'는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곤 한다. 나 역시 그 편견에 사로잡혀 한동안 이 영화를 나의 선택에서 배제시켰다. 진정한 메시지는 영상만으로도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게 해 준 영화였다. 그것이 영화의 힘이다.

둘, 이 영화의 대사는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니다.

배우들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하며 대사가 만들어졌다.

셋,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모두 직업 배우가 아니다.

현지에서 길거리 캐스팅된 난민, 노숙자, 불법체류자들이다. 대본 없이, 감독이 상황만 제시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연기했다. 주인공 자인(Zain)의 변호사 역은 감독 본인이 직접 맡았고, 판사 역은 실제 현직 판사가 연기했다.

이처럼 전문 배우 없이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감독상, 스톡홀름 영화제 각본상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래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흥행에도 성공한다.

넷, 이 영화는 '아동 인권을 위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프롤로그로 기획된다.

그 프로젝트의 연장선 상에서 제작진은 출연 배우들을 지금까지도 지원하고 있으며, 실제 난민이었던 주인공 자인은 촬영 이후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로 망명할 수 있었다.


가버나움, 회개 없는 땅

영화의 타이틀이 된 ‘가버나움(Capernaum)’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 위치한 고대 도시의 이름이다. 예수가 가장 많은 기적을 행했던 곳이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아 심판을 받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영화 속 레바논의 베이루트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라는 점에서 성경 속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와 겹쳐진다. 부모와 어른들이 책임을 외면하고 아이들이 고통받는 베이루트의 현실은,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가버나움과 닮았다. 죄책감도, 회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당화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 영화는 그런 회개 없는 도시의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법정에서 자인의 부모와 매부(사하르의 남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사하르)을 죽음에 몰아넣고도 그들 중 아무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없다.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베이루트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한데 섞여 있는 혼돈의 장소이다. 빈부문제, 노숙인, 매매혼, 마약, 의료문제, 여성차별, 아동노동 착취, 불법체류자와 난민,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법 중개인들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혼재되어 있는 곳으로 마치 희망이 없는 곳으로 묘사된다.


가버나움 같은 지옥에서 외치다


희망을 잃은 눈빛과 어린아이 답지 않은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표정의 열두 살 소년, 자인.

존재하지만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

그래서 자신의 나이조차 정확하게 모르는 그 아이는 세상을 향해 절규한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사는 게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 같은 삶이에요. 통닭처럼 불 속에 구워지고 있어요. 인생이 거지 같아요.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

자신의 외침에 귀 기울여 준 변호사를 만나고, 어린 자신과 동생들을 방치하며 끝없이 비참한 삶 속으로 몰아넣은 부모를 고소한다. 그리고 법정에 서게 된다.

“왜 부모를 고소했죠?”라는 판사의 물음에,

그는 단호하게 답한다.

“나를 태어나게 해서요.”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


자인의 부모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보지도 지키지도 않았다. 아니, 보호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딸 사하르는 첫 월경을 시작하자마자 집세 대신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팔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혈 끝에 죽음을 맞았다. 병원은 출생 증명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난 적 없는 아이처럼,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여동생이 팔려가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자인은 결국 집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불법체류자 라힐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라힐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게 되자, 자인은 그녀의 부재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기 요나스를 맡아 돌본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데 급급한 열두 살 아이. 또 다른 어린 생명을 돌보고 책임지려 애쓰는 모습은 어른보다 훨씬 나은 어른스러움을 보여준다.


회피하는 어른들, 침묵하는 공동체


법정에서 자인의 아버지는 말한다.

“결혼하면 적어도 침대에서 잘 수 있잖아요.”

자인의 어머니도 말한다.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는데, 왜 나를 비난하죠?”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다고? 차라리 죽을힘을 다해 욕구를 누르고 아이들을 낳지 말았어야지. 그들은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고, 6~7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좁고 열악한 집에서 낳아 방치한다. 어느 정도 자라면 생계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거나 책임질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이들의 말에는 변명만 가득했고, 자기 합리화로 얼룩져 있었다. 한마디로 회개의 부재였다.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도시는 가버나움이다. 회개 없는 죄는 곧 체념이 되고, 체념은 무감각이 되어 이 도시는 지옥을 방불케 한다.

마지막 장면, 그의 미소띤 얼굴아 인상적이다. 영화 내내지옥을 경험한 듯한 그의 얼굴표정과 겹쳐져 더욱 그렇다.

신분증 사진을 찍으면서 주인공이 보여준 해맑은 미소. 그것은 영화가 전하려 한 메시지를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어떤 지옥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처럼, 기적과도 같은 미소가 이 한 아이의 얼굴에서 피어난다.

회개 없는 땅에서, 구원의 씨앗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인간은 자신만을 사랑할 때 구원을 잃는다고. 인간의 구원과 희망은 나를 위한 고립된 삶을 사는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이 영화 역시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돌볼 때 가버나움 같은 곳에서도 희망은 피어나고 기적은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아닐까.

자인의 삶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망이 망가진 사회의 참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베이루트의 빈민가도 사회적 연결망이 무너져 내려 서로의 가치가 공유되지 않는다. 각자의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이 자인의 부모와 여동생의 남편의 법정변론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다. 공동체의 부재 속에서 개인의 삶은 무너지고, 그리고 아이는 그 무너진 삶의 부스러기처럼 버려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요나스를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카메라를 통해 자인의 존재를 증명해 주었다. 서로에게 손 내미는 순간, 기적은 일어난다.

이 영화는 각자도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공동체를 향해 쏟아낸 절박한 외침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 또한 하나의 가버나움이다. 각자도생으로 공동체는 와해되고 서로에게 손 내밀지 못하는 지금의 이곳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했던 스스로를 회개하고 다시 사랑으로 서로에게 손내밀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를, 아니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까. 회개 없는 고대도시 가버나움은 결국 무너졌지만, 가버나움 같았던 이 도시에서 서로의 아픔에 손 내밀어 희망을 다시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기적은 다시 일어날까. 파 한뿌리의 돌봄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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