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퇴사 후의 공백. 그 틈에 불현듯 찾아온 공허함과 고요함. 그 멈춰 선 시간 속에서 내가 나에게 조심스레 던진 질문이 있었다.
‘지금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런 질문이라니, 나조차도 좀 생뚱맞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해온 일 말고, 남들이 잘한다고 말해준 일 말고, 정말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남은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채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에게 꼭 묻고 가야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던 참에 우연히 보게 된 구인광고, 한 줄. 보건 빅데이터를 다루는 일이었다. 전국 관련센터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지표를 정리하고, 사람들의 몸 안에 쌓인 삶의 흔적의 패턴을 수치로 읽어내는 일.
6개월 동안 그 프로젝트를 보고서로 정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계속하고 싶어 하는구나. 이 분야에 대한 경험과 커리어를 쌓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대체로 그렇듯, 내가 뜻한 시간에 내가 뜻한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만지고 해석하는 일, 정말 하고 싶었던 그 일에, 그 6개월을 끝으로 다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몇 년 전 읽었던 이 책을 마지막 직장을 떠난 뒤 다시 꺼내 들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책장을 넘기자, 빅데이터를 분석하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 그래프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때 새로운 분야에 대해 품었던 호기심과 기대로 두근거렸던 그 마음이 소환되어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객관적인 데이터로 말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 그래프 속의 숫자들은 이상하게도 문학작품처럼 나의 감정을 건드렸다. 논리로 짜인 언어 속에 어느새 내 감정을 투영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과도 마주했다. 차별과 불평등 속에서 스스로를 약자라 여겼던 나. 용기 내지 못해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결국 내 몸에 새길 수밖에 없었던 나. 그리고 그런 우리 모두를, 조용히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
입은 다물어도 몸은 말한다. 사회역학은 그 말을 듣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겪는 관계와 사건-차별, 폭력, 빈곤, 결핍 같은 것들, 그 조각난 파편들이 고스란히 몸에 박힌다. 의식하지 못해도 말로 꺼내지 못해도, 몸은 기억한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써 내려간 진단서처럼.
이 책 속의 데이터는 명확하고 확실하다. 그리고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진실을 밀어 올린다. 말이 아니라 숫자로 상처를 말하는 통계는 몸이 증언한 진실이었다. 차별, 가난, 학교폭력, 낙태 금지, 폭염 등과 같은 사회가 행한 폭력의 고통은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살면서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한 고통이 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소리 없이 재현된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시절, 낙태 금지법으로 일어났던 집단적 외상들이 데이터를 통해서 드러난다. 낙태 금지 이후 수많은 여성이 병원이 받아주지 않아, 불법 낙태에 의존했다. 이로 인해 매년 500여 명이 출혈, 감염, 합병증 등으로 사망한다. 그 당시 루마니아 모성 사망률은 주변국의 9배에 달했다.
또 다른 사회적 재난, 1995년의 시카고의 폭염. 그 여름,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고립 때문이었다. 사회적 관계가 끊긴 사람부터 쓰러졌다. 하지만 서로가 함께한 사회는 바꿀 수 있었다. 정책은 바뀌었고,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생존을 지탱한 건 에어컨이 아니라 연대였다. 서로를 돌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런 데이터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몸이 아픈 이유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겪는 고통을 말하지 않고 오래 참아온 탓이었다. 우리의 고통에 다른 누군가는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외면당한 슬픔 때문이다. 몸은 기억한다.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말할 것이다.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
이 문장은 내 안의 어떤 오래된 통증을 건드렸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이들에게 몸은 신호를 보낸다. 그건 우울이고, 불안이고, 때로는 자살 충동이다. 말보다 선명한 신호. 몸이 울부짖는 절규와도 같다.
나는 영화 <가버나움>의 자인을 떠올렸다. 출생증명서도, 신분도 없이 그냥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아이. 그 아이는 세상에 분명 살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존중하지도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지옥이다.
더 깊은 지옥으로 타인을 몰아넣은 자도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등장한 우생학자 조던 스티븐슨. 그는 인간 존재의 가치기준을 제멋대로 선 긋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고 낙인찍어 지워버렸다. 타인의 삶을 지우면서까지, 잘못된 자기 확신을 지켜내려 했다. 그것은 과학적 신념이 아니라 폭력이었고,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이 책에서 나를 정면으로 가격한 문장 하나.
"소수자는 언제든, 누구든 될 수 있다."
지금 내가 주류라 착각하며 안도하고 있다면, 그건 아주 잠깐 허락된 착시일 뿐이다. 단 한 번의 구조 붕괴,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불운이면 그 자리는 뒤집힌다. 그래서 차별은 어리석다. 그건 누군가를 짓밟는 일이 아니라, 나를 미리 파묻는 일이다. 차별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차별은 뇌에서 통증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뇌는 그것을 안다. 차별은 말로 때리는 고통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말, 조롱, 침묵, 외면—그건 주먹보다 오래 남는다. 육체적 폭력과 똑같은 고통을 만든다. 뇌는 똑같이 반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은, 단지 진료실에서 약을 받는 것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약이 아니라 ‘사회적 응답’이다. 기억, 보상, 사과, 회복. 이 네 단어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사회적 처방전이다.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모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 모욕당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지워선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고립은 곧 고통과 아픔으로 나타나 병이 되니까.
이응노의 ‘군상’. 그림 속 수많은 사람이 어깨를 맞댄 채, 서로를 붙들고 서 있다.
이 책은 ‘연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에게서 바꿔놓았다. 그것은 이제 인간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존엄의 조건이다.
우리는 연결된 존재다. 누군가의 체온이, 눈빛이, 말이—나를 붙잡아 이곳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살아 있게 한다. 저자는 연결은 생존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관계망이 약해질수록 심장병은 늘었고, 죽음은 빨리 다가왔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도 무너져 병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공동체는 안녕하신가요?”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한다.
1950~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위치한 로세토 마을. 그곳에서 서로를 돌보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심장은 멀쩡했다. 그들은 그때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자본주의가 마을을 파고들던 어느 날, 서로를 지키던 울타리는 무너졌다. 돌봄은 사라졌고, 병은 두 배로 늘었다. 연결이 사라진 곳에 삶도 사라졌다.
로세토 마을과 대조적인 마을이 떠오른다. ‘도그빌(Dogville)’. 약한 자를 조용히 조리돌림하던 마을. 착취하고 조롱하며, 누구 하나 죄책감 없이 잠드는 곳. 겉으론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서로를 짓밟는 곳. 그게 진짜 지옥이다.
그러니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혼자가 되어선 안 된다. 함께 걸어야 한다. 손을 잡고, 묻고, 듣고, 무너진 지점을 함께 들여다보고, 아픔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세월호에서, 이태원에서, 건설현장에서,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고, 누군가는 자기 몸을 마지막 외침으로 삼았다. 그들의 고통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사회가 부정한 존재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더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 내 고통을 알아봐 줄 사람은 있는가. 누군가의 상처에 내가 다가갈 수 있는가.
상처를 피하지 말고, 말하라. 혼자 앓지 말고, 연결하라.
아픔을 기억하라. 거기에 길이 있다.
위기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위기를 함께 건널 손이 없을까 봐 두려운 거라는 걸. 그래서 말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손이 그 길 위에 함께 있어야 한다. 파 한 뿌리라도 건네며, 함께 건너가자고 말해야 한다.
이응노의 〈군상〉에는 수천의 형체가 서로 기대고 엉켜 있다. 마치 무작위의 혼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묘한 질서와 리듬이 있다.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연결된 존재들. 이 그림은 연대의 이미지인 동시에 고립과 불안의 얼굴이기도 하다.
비슷한 구조가 또 하나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바로 프레이밍햄 심장 연구 데이터를 통해 시각화한 사회적 관계망 속 비만의 분포다. 사람들은 혼자서 병들지 않는다. 고립도, 비만도, 우울도, 심장병도… 관계망 속에서 함께 번지고, 공유되고, 감염된다. 어느 하나가 아프면 주변이 함께 흔들린다.
이 두 그림은 닮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결이 건강할 때는 삶이지만, 끊어지고 오염될 때는 재난이 된다는 것.
사회적 연결망은 보이지 않는 인프라다.
그것이 무너지면, 사람도 함께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