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까맣다. 털이 보들보들하다. 허리가 길다. 앉을 때 앞발을 땅에 딛는다. 앞에서 보면 넙적한데 옆에서 보면 날렵하다. 뒤에서 보면 버들 같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짖는다. 가끔씩 잠을 자며 으르렁댄다. 가족이 집에 들어오면 꼬리를 흔든다. 반가우면 낑낑 소리를 내며 안절부절 못한다. 원하는 게 있으면 앞에 앉아 빤히 쳐다본다. 반응이 없으면 앞발을 동동 구르며 낑낑 소리를 낸다. 집밖을 나가는 것 같으면 안아달라고 다리를 짚고 일어선다. 산책할 때 네 발로 걷는다. 집에 있을 때도 네 발로 걷는다. 다리가 얇상하고 발에는 푹신한 쿠션이 있다. 신이 나면 걸음이 빨라지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리드줄에 팽팽한 힘이 느껴진다. 힘들면 헥헥댄다. 입을 옆으로 쭉 벌리고 웃는 듯이 혀를 내민다. 집에 돌아와 씻길 때는 가만히 발을 내민다. 화장실을 나와서야 참았던 성을 낸다. 젖은 털로 여기저기를 재빠르게 내달린다. 잡으려고 하면 왕왕 짖는다. 도망갈 곳이 없으면 배를 뒤집어 깐다. 다른 곳은 온통 갈색인데 턱 주변은 하얗다. 배를 만져주면 콧김을 한 번 세게 내쉰다. 고개를 내리고 편하게 눕는다.
방에 들어오고 싶으면 앞발로 문을 살살 민다. 꼭 닫혀있지 않으면 문이 살짝 열린다. 열린 문 틈으로 얼굴 먼저 들이민다. 문이 꼭 닫혀있으면 열리지 않는다. 몇 번 해보고 가거나, 방문 앞에 앉아 낑낑댄다. 아침에 자고 있으면 어느새 들어와서 얼굴을 핥는다. 잠깐 핥다가 내 옆이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누워있다가 큰 소리가 들리면 잠깐 눈을 뜬다. 쓰다듬어주면 다시 서서히 눈을 감는다. 놀고 싶을 때면 장난감으로 노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가 사람을 쳐다본다. 다가가면 뺏어보라는 듯이 장난감을 앞발로 짚는다. 아니면 물고 쿠션 위로 도망간다. 장난감을 뺏어 던지면 신나서 달려간다. 다시 물고 쿠션 위나 다리 사이로 돌아온다. 장난감을 앞발로 잡고 물며 논다. 종이컵에 간식을 넣어주면 혼자서도 잘 논다. 사람 곁에서 쉴 때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불을 들어주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잠을 잘 때면 자기도 자느라 곁을 잘 떠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 미쯔일까?
이 모든 것이 미쯔다. 미쯔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적어야한다. '미쯔'라는 단일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미쯔'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생김새와 소리와 촉감과 행동과 기억만이 존재할 뿐이고, 이 부분들이 얽혀서 미쯔가 될 뿐이다. 우선은 일부만 있고 전체는 없다. 그 다음에 부분들이 얽혀서 전체를 구성한다. 일단 전체가 구성되고 나면, '미쯔'의 존재는 나에게 사실이 된다.
미쯔는 강아지다. 강아지는 미쯔가 아니다. 미쯔는 강아지로 규정되지만 강아지는 미쯔로 규정되지 않는다. 강아지라는 어떠한 것이 있다. 미쯔의 모습과 행동 양태로부터 사람들은 미쯔의 '강아지임'을 확인한다. 강아지를 좋아할 수도 있고, 미쯔를 좋아할 수도 있다. 강아지를 좋아하면 어떤 강아지든 상관없다. 우리집 미쯔일 수도 있고, 삼촌네집 영광이일 수도 있다. 나는 영광이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내가 강아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광이의 '강아지임'을 좋아한다. 내 인식 속에서 영광이는 '강아지'라는 어떠한 관념적인 것이 개별자로 파생된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영광이는 '강아지'로 규정된다. '강아지임'이라는 것은 영광이와 미쯔를 정의하는 하나의 규정이자 형식이다. 인식론적으로 나는 우선 개별적인 강아지들을 본 후, 그러한 형태를 지닌 존재자가 '강아지'라는 하나의 규정 아래 묶임을 배웠다. 그러므로 개체가 우선이고 종이 나중이다. 그러나 일단 배워서 그러한 묶음이 나에게 당연해지고 나면, 종이 우선이고 개체가 나중이 된다. 인식론과 존재론은 이렇게 역순이고, 이렇게 한 끗 차이다. 모든 개체는 '종'의 다채로운 표현형이다. 나는 미쯔를 좋아한다. 미쯔의 강아지임을 확인하기 이전에 감각되는 각각의 생김새와 행동의 묶음을 좋아한다. 그것들이 묶여 '미쯔'가 된다. 그런데 일단 전체가 구성되고 나면, 그 전체가 일부의 근원이자 주인이 된다. 각각의 감각을 규정하는 '미쯔'라는 것의 존재, 미쯔를 규정하는 '강아지'라는 것의 존재. 개별자를 구성하는 전체의 존재가, 전체의 권위가 사실이 된다.
미쯔도 하품을 한다. 나도 하품을 한다. 미쯔에게는 두뇌와 심장, 폐와 간, 위와 장이 있다. 나에게도 똑같은 것이 있다. 팔다리에 무릎과 팔꿈치가 있고, 머리와 연결된 척추가 있다. 근육이 있고 피부가 있고 털이 있다. 말과 의사표시를 통해 유사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공통된 것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미쯔와 나는 동일한 조상의 표현형이다. 미쯔는 강아지로 규정된다. 나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강아지와 사람은 동일한 조상의, 동일한 근원의 파생태다. 강아지는 사람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강아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색연필'인데 어느 것은 파란색, 어느 것은 주황색, 어느 것은 노란색이듯이, 사람, 개, 노루, 두더지, 개미 등등은 모두 '동물'로서의 변형태가 아닐까? 미쯔와 영광이가 '같은' 강아지듯이, 또, 너와 내가 '같은' 사람이듯이, 사람과 개미는 '같은' 동물이다. 묶으면 묶을수록 유사성이 커진다. 식물도 묶어보자. 동물과 식물은 '같은' 생물이다. 생물과 무생물은 '같은' 물체다. 물체와 생각, 감정, 느낌 등은 모두 '동일하게'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구성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다. 마침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하나로 묶어내면, 다만 '이러한 것'으로 인식된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도록,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도록, 다만 '그렇게 된 것'. 이 지점에서 세상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인다. 너와 나, 사람과 개, 사슴과 버섯, 진달래와 바위, 물체와 감정, 그 모든 것이 동일한 근원의 표현태가 된다. '강아지'의 차원에서 개체는 상관없다. 미쯔든 영광이든 해피든 누렁이든 상관없다. '생물'의 차원에서 종은 상관없다. 사람이든 개미든 목련이든 잔디든 상관없다. '이렇게 됨'의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상관없다'. 세계 안의 어느 무엇이든 상관없고, 설령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 인식이 여기에 이르면 내게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이렇게 됨'이라는 최상의 형식이 '강아지'라는 것이 실재하듯이 실재하게 된다. 개체와 상관없이 '강아지'를 생각하고 좋아하듯 아무런 구체성 없이도 세상의 '이렇게 됨'을 생각하고 좋아할 수 있게 된다.
내 사고는 타인에게는 난해한 편이다. 내 사고의 출발점 자체가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고와 윤리가 파생되는 원천 자체가 이처럼 일반과는 다른 과정에 의해 형성되어있다. 맥락과 관점이 다르므로 하는 말이 다르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담고있는 의미가 다르다. 다만 나는 미쯔와 누워서 잠을 청하다가 문득 글감이 떠올라서 휴대폰을 들고 글을 썼다. 이 글이 내포하는 함의가 몹시 깊고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와 같이 썼다. 그러나 사실을 쓰지 않았다. 다만 내 눈 앞에 놓인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는 표현을 썼을 뿐이다. 나는 내 기준과 사고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내 기준과 사고가 '이렇게 형성되었음'을 내보일 뿐이다. 다르게 형성되었다면 다르게 썼을 것이다. 관조적인 차원에서 나는 이러한 나의 모습이 아쉽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다. 우월해 보이지도 않고 저열해 보이지도 않다. 다만 이렇게 존재함을, 저렇게는 존재하지 않음을 바라볼 뿐이다. 물론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때로는 아쉽고 때로는 자랑스럽다. 때로는 우월하게, 때로는 저열하게 느껴진다. 실천과 관조를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할 수 없이 오간다. 두 태도를 하나로 만드는 것, 두 태도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관조하며 이런저런 가치를 따라서 내가 다만 살아감을 본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었음을 바라본다.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본다. 그리고는 지켜본 바를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