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16. 소리없이 계절이 바뀌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16.소리없이 계절이 바뀌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져 갈 것이라고.

by lee

16.

수혁이 진료실울 나선 이후 나는 문자를 썼다. 이제 만나지 않겠다는 짧은 메세지였다.

하지만 수혁의 모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모든 곳에서 그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함께 누운 침대, 그를 위해 사놓은 레몬수, 화장실의 파란 칫솔. 사랑한다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갈망을 확신했었다. 그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나에게 그는 방황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감싸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주제 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진료실 앞에서 지안을 손을 잡고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의 불운한 결혼생활 동안 그를 회상하며 그라면 좋은 가정을 꾸렸을 것이라던 막연한 상상은 사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는 좋은 남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의 역할을 놓지 않으리라는.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은 수혁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애매하게 끝내버린 첫사랑이라는 기억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만나자.’


그의 짧은 문자에 마음이 흔들렸다. 부인할 수 없는 사살은,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오래토록 망설였다. ‘연락하지 마세요.’ 라고 쓰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메세지 대신 전화를 걸었다.


“이제……그만해요.”


침묵이 흘렀다. 그의 낮은 숨소리에 심장이 울렸다. 나는 되뇌였다. 이제는 담배냄새를 지우고 가로등 사이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랑일지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는 끝내야 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오랜 침묵 끝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 결말을 예상한 듯.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머물 곳은 아내와 아이 곁일 테니까.

왈칵 눈물이 터졌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듯. 그와의 이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러 놓았던 나의 케케묵은 감정과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과거를 떠나보내 주었다.


수혁과의 관계를 끊어냈지만, 또 다른 거짓말이 남아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정 선생님은 흔쾌히 나와주었다.


“어쩐 일이에요?”

“……미안해요.”


입술을 꽉 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노라, 그래서 그의 마음을 더 걱정시키거나 아프게 만들지 않겠노라, 다시 다짐했다.


“정말……미안해요.”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애초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나쁜 년 소리를 듣더라도 수혁과의 관계를 모두 말하고 용서를 빌겠노라 다짐했었는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정적이 흘렀다. 커피잔의 커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그가 잔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요.”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잔 밑에 남은 물자국이 둥근 원을 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식은 잔의 표면을 훑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지영 씨는…… 어때요?”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냥… 견디고 있어요.”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잔을 밀어두었다.

“조금씩 괜찮아질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잔잔한 미소가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게 더 아팠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모르는 줄 알았다. 아니,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 위의 조명이 우리 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가 겹쳤다가, 다시 나뉘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 씨도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이 목 끝에 걸렸다.


“오늘 바람이 좀 차네요.”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들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요.”


나는 그 외투를 바라보다, 역시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옆을 지나쳐가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든, 괜찮을 때 와요.”


그가 떠난 뒤, 나는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의 모습을 쫓을 수 없도록.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야 카페 밖으로 나섰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얇은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걸었다. 그의 말 중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변하지 않은 온도로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니,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억지로 옆에 누군가를 붙잡아 두려던 것은 그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벅찬 현실을 외면하고자 결혼했고, 결혼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첫사랑을 찾았고, 첫사랑이 외면했을 때 새 인연을 만났다. 모든 순간에 진실하지도, 충실하지도 않았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혼자인 것이 이토록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모두를 보내고서야 나는 비로소 완전해졌다.

사랑은 없지만, 나는 끝나지 않았다.

불 켜지 않은 거실에 밤이 찾아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가로등 그림자를 쫓지 않아도 되었다. 그림자를 붙잡으러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정선생님의 문자였다. 우리가 헤어진 이후 첫 근무를 나가는 날이었다. 그의 방식대로의 나에 대한 배려였다.

여전히 겨울이었다. 바람이 찼다.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하나 둘 느리게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디딜때마다 녹지 않은 눈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단단한 소리였다.

봄이 오면 얼어붙어 단단해진 얼음도 녹을 것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소리없이 계절이 바뀌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져 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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