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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Mar 11. 2024

부모의 ‘치우친 저울’과 아이의 ‘투자 실패’

부모의 편향은 아이와의 '베드 핏'의 원인이 됩니다. 

부모가 한쪽으로 치우친 저울을 애용한다면?


아이에겐 편향과 편견이 생깁니다.     


언제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세요?


보통 우리는 나의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야~ 뚱땡이!”

“넌 할머니랑 산다며?”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냐?”     


나를 공격하는 말속에 내가 속한 집단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죠.

 

나는 뚱뚱한 사람이구나. 

나는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랑 사는 사람이구나. 

나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아 옷이 별로 없는 사람이구나.  

 정체성의 위기가 닥치면,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일관성 있게 알 수 있도록 구성하는 개념들(정체성)이 망가질 위기에 처하면, 즉 원래 '나는 공부도 잘하고 동생 하고도 사이좋게 지내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너는 뚱뚱한 사람이야.”라는 평가 하나로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정체성 위기가 찾아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치우친 저울’이 나타납니다.    

  

‘나는 뚱뚱하다고 한 애들은 날씬한데, 걔들은 공부를 못하고 가난한 동네에 살아. 아, 공부 못하는 애들은 열등감 때문에 겉모습만 신경 써서 내 외모를 지적질하는구나. 역시 공부 못하는 애들이랑은 상종하면 안 돼.’라며 차별적인 사고를 만들어 내죠.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는 이유는 뭘까요?  


심리학자인 올포트와 스틸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지키고 이를 통해 자존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기 위해섭니다. 

부모가 '치우친 저울'을 사용하는 이유가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실제로 한 동네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임대되는 아파트와 상당히 비싼 가격의 아파트가 있었는데, 편의상 전자를 A아파트라고 하고, 후자를 B아파트라고 부르겠습니다. 


A아파트에 사는 엄마는 아이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고 B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놀라고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거야. B아파트에 사는 애들이 더 잘살고 공부도 잘하잖아.”

“이번에 진혁이가 반에서 1등 했는데, 우리 아파트 살잖아.”     


비싼 아파트에 사는 애들이 공부를 더 잘한다는 엄마의 편견은 아이가 내민 증거로 인해 산산조각 납니다.  잠시 당황하지만 엄마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쉽게 깨지지 않죠. 


“우리 아파트 사는 성호는 애들 때려서 학폭위 열렸고, 민수랑 재욱이는 게임중독이라며.”     


엄마의 이러한 행동을 심리학자인 올포트는 ‘다시 울타리 치기(re-fencing)’이라고 부르는데요.


누군가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는 증거를 제시하면, 그것만 예외로 인정하는 척하고, 다시 울타리를 치면서 자신의 치우친 생각을 고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이 엄마의 소속집단은 A아파트 주민입니다. 


그런데 왜 엄마는 B아파트 사람들을 더 좋게 보는 걸까요?      


그건 바로 '준거 집단'때문입니다. 

‘준거 집단’은 ‘개인이 심리적으로 자신과 관련되기를 바라는 집단’으로 실제로 소속되는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엄마가 실제 속한 ‘내집단’은 A아파트 주민이지만,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준거 집단’은 B아파트 주민이니까요.      


아마, 이쯤에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자신의 가치와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나는 B아파트에 살고 싶고 그래서 B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내가 속한 A아파트 사람보다 더 좋게 볼 거야. 돈이 많은 사람은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킬 테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비행도 안 저지르겠지. 우리 아이는 그런 애들이랑 어울려야 해.’      


이렇게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기울어진 저울은 뇌를 객관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정서를 촉진해서 잘못된 판단과 결과를 초래하죠.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우리는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요?


우리는 모임에 온 사람들을 훑어보며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부모들을 살펴보며 나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을 찾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내가 자신의 외모나 학력이 평균 이하라고 믿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외모나 학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세어본다는 거죠.      


학부모 중에서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다면, 나는 정체성에 위기를 느끼고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 소속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모임에 나가지 않는 거죠.      


우리가 편향된 사고를 하면, 나와 같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 소속되려 하는데 심리학자인 스틸은 이것을 '임계질량신호'라고 부릅니다.      


내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나의 정체성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죠.      


만약에 나와 비슷한 능력과 지위와 외모와 환경 등을 가진 사람 중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어떨까요?      


내가 여성이고 엄마고 주부인데, 사람들이 여성이고 엄마고 주부인 사람을 별 볼 일 없다고 여기고 그러한 사람 중에 사회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전혀 없다면, 여성이고 엄마면서 주부인 사람은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지요.      


나는 스스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에게 부여할 테니까요.     

 

올포트는 “사람은 옳든 그르든 자신에 대한 악평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성격이 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성이자 엄마이면서 주부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하면, 이를 진실이라고 믿게 되면서, 자존감과 의욕이 상실하고 자신에 대한 기대치도 낮아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런 과정에서 나의 성격까지 변한다는 겁니다. 

   

현재 나의 성격, 마음에 드세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기 위해 갖고 있는 저울을 잘 살펴보세요. 

한쪽으로 기울어져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판단하지 않고, 내가 소속되길 바라는 '준거 집단‘에 속하기 위해, 내가 속한 집단을 부끄러워하며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상대가 나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거나 학력과 지위가 높지 않다고 무시한다면, 그건 상대의 비상식적인 태도가 문제고 그러한 문화를 독려하는 사회가 병든 겁니다.   

   

제가 만난 다수의 부모들은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갖고 있었지만 내면의 결핍과 불안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유한 '내집단'의 일원이었지만, 소속되고 싶은 '준거 집단‘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의 집단이었죠.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늘 나에게 없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살기가 어렵죠. 


만약 부모가 '치우친 저울'을 사용해 아이를 키우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세요. 


아이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마법의 콩(부모에게 받은 애정과 관심)을 나눠주며 관계를 이루는데, 아이 또한 '치우친 저울'을 갖고 판단을 하다 보니, 자신이 가진 마법의 콩을 잔뜩 줘도 하나도 주지 않는 상대를 만나거나, 반대로 계속해서 내 아이가 가진 마법의 콩만 달라는 사람을 만날 겁니다.   


https://brunch.co.kr/@459430a354354ac/42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친구는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아이는  

    

“그 애는 불쌍한 애야.”라고 말하거나, 

“개는 멋진 애야. 애들이 다 좋아해.”라며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콩을 나눠 주겠죠. 


다시 말해, 인간관계에 '잘못된 투자'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나면 아이는 어딘가라도 소속되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인관 관계를 맺기 위한 자본인 마법의 콩을 다 주고 남은 게 없는 아이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별다른 의욕이나 동기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마치 잘못된 투자로 전 재산을 날린 것처럼요. 


물론 일부는 남은 콩을 절대로 뺏기지 않으려 관계의 문을 걸어 잠그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 역시 치우친 저울로 인한 투자 실패의 결과죠.      


내가 부모에게 받은 마법의 콩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바닥이 나죠.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며 마법의 콩을 주고받습니다. 만약 내가 가진 것만 지키려고 한다면 살면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남은 콩을 다 써버릴 테고 언젠간 빈털터리가 됩니다. 


사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나보다 더 많은 콩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가 준 것보다 더 받을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더 줄 때도 있지요. 


중요한 건
아이가 중심이 잘 맞는 저울을 사용해서
이 사람에게는 얼마큼의 마법의 콩을 주어야 할지 잘 헤아려 콩을 나누며
건강한 인간관계를 이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인 나의 '치우친 저울'을 바로 잡아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매번 사람과의 관계에서 투자 실패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참고문헌

Steele. C. M. (2014). 고정관념은 세상을 어떻게 위협하는가(정여진 역). 서울: 바이북스.


사진출처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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