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걸음
중학교 3학년 가을, 수학 수행평가 때였다. 일곱 명으로 조를 짜야 했다.
“은오랑 같이 할 모둠 없어?”
선생님 말에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 조를 짰고 은오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야.”
유성이 지형에게 말했다.
“왜.”
“우리 쟤랑 하자.”
“싫어.”
“쟤 공부 완전 잘함.”
“그래도 싫어.”
“니 삼각비 뭔지 아냐?”
“김은오, 우리랑 하자.”
지형이 은오를 향해 고개를 들어 다정한 미소로 상냥하게 말했다.
수행평가 용지가 일곱 명 앞에 놓였다.
“니가 써.”
유성이 지형에게 내밀었다. 지형이 샤프를 들어 조원 명단에 이름을 쓰자 유성이 불렀다.
“김은오, 정유성, 김윤지, 이세혁, 곽민규, 김소원, 니는 맨 마지막.”
“응. 니가 맨 마지막.”
“저기.”
말한 은오를 모두 쳐다봤다. 유성은 눈을 번쩍 뜨고 집중했다. 김은오 입에서 말이 나왔다!
“왜?”
유성이 물었다.
“내 이름.”
지형이 용지를 들여다봤다.
“김은호 아니고 김은오야.”
특유의 들릴 듯 말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은오가 말했다. 유성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의자를 들썩이며 웃어젖혔고 윤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고 지형은 입을 실룩이며 글자를 고쳤다.
윤지가 웃음을 멈추고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자 눈앞에 유성이 빤히 보고 있었다. 가슴이 콩, 윤지 얼굴이 빨개졌다.
“왜 문자 답장 안 해?”
살짝 더듬으며 윤지가 물었다.
“응?”
여전히 빤히 쳐다보며 유성이 되물었다.
“고백한 거 왜 답장 안 하냐고.”
조용해졌다. 윤지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유성이 말했다.
“야.”
“응?”
“사귈래?”
윤지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야, 얘 여친 사귀고 한 달 넘긴 적 없음.”
지형이 윤지에게 말했다.
“조용히 해.”
유성이 지형을 툭 치고 윤지에게 말했다.
“싫어?”
“좋아.”
윤지가 다급히 말했다.
“야, 유성이랑 김윤지랑 사귄대.”
민규가 크게 말하자 반은 소란스러워지고 반은 조용해졌다.
고등학교 지망서를 쓰고 난 후, 유성이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은오가 오고 있었다.
이제 못 보겠네.
유성은 은오에게 고등학교 어디 썼냐고 묻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그래, 물어보자.
용기를 내 두 걸음 전진하다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배정이 발표되었다.
“야, 공전 된 사람?”
유성은 일부러 떠들고 다녔다. 애들이 대답해왔다. 그때 은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유성을 봤다. 옳다구나, 유성이 기회다 싶어 말을 걸으려는데 은오는 바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유성은 점점 깨달았다.
나 왜 이렇게 걔 의식하지?
나 걔 좋아하나?
좋아하나, 진짜?
“나……걔 좋아하는구나.”
길 가다 우뚝 서서 저도 모르게 말했다. 문제는 내일이 졸업식이었다.
유성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발표를 준비하듯 내일을 상상한 후 각오하고 준비된 자세로 잠이 들었다.
모든 계획이 파토났다. 김은오가 졸업식 시작이 다 되어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성은 애를 태우며 시계만 쳐다봤다. 기어코 선생님까지 들어왔는데도 안 왔다.
“자, 다 왔니?”
“……김은오 안 왔어요.”
누가 유성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뭐? 누구 은오 번호 아는 애 빨리 전화 좀 해봐.”
아무도 없었다.
“일단 다들 지금 강당으로 이동하자.”
말하면서 핸드폰을 들고 교실을 나가는 선생님을 유성은 빠르게 따라갔다.
“여보세요? 은오야......뭐? 너 지금 일어났니? 야, 넌 졸업식날에도 지각을 하면 어떡하니?”
“부모님 집에 안 계셔?......삼십 분?...교실엔 왜?...알았어. 지금 빨리 와. 당장.”
전화를 끊은 선생님은 한숨을 쉬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계단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유성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유성이! 너 여기서 뭐해? 쌤한테 할 말 있어?”
“어, 음.”
“빨리 강당 가! 지금!”
유성은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 교실 앞에 섰다. 불 꺼진 교실들과 복도엔 혼자뿐이었다.
은오는 이십 분이 되어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장이 다급하게 뛰었다.
‘엇갈렸나?’
생각하는 순간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헉! 유성은 바로 옆에 있는 남자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교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 살폈다. 잠시 후 교실 뒷문이 벌컥 열리고 은오가 나와 강당을 향하는 쪽으로 걸어갔다. 유성은 다급히 뛰어나와 내뱉었다.
“김은오.”
긴장이 최고치에 달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은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비된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하려니 이상했다. 이판사판이다, 유성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애들 다 어디 갔어?”
황당한 말이 나왔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강당 갔지.”
당연하다는 듯 은오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유성은 다가가 걸어가는 김은오 옆에 붙어 걸었다.
“가자.”
좋아, 꽤 자연스러웠다. 삼 년이란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야 이러는 게 후회되었다. 은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기는 처음이었다. 강당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준비한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지? 근데 그 말이 뭐였지?
결국 강당을 한 층 남겨놓았을 때 다급하게 물었다.
“너 학교 어디 됐어?”
“공전.”
봄바람 부는 듯 느린 말투로 은오가 대답했다. 유성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눈물 나게 기뻤다.
“똑같네.”
기분 째졌다. 유성은 은오 옆에 붙어 걸으며 강당 안으로 들어가 3학년 2반 줄로 다가갔다. 지형이 자리를 맡아놓고 유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왜 쟤랑 같이 와?”
지형이 의아함과 놀람이 섞인 눈으로 물었다.
“내가 이따 얘기해줄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말하자 지형이 신나는 얼굴을 했다.
“오오. 뭔데, 뭔데.”
“이따, 이따. 끝나고.”
“헐 뭐임? 대박. 뭐냐?”
유성이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입에 갖다 대자 지형이 장난기 가득 변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유성 팔을 흔들며 지형이 재촉했다.
“야야, 뭐냐고, 니. 어디 갔다 온 거냐고.”
“교실.”
“왜.”
“김은오 기다리러.”
“왜?!”
유성은 지형에게 어깨를 걸치며 은밀하게 말했다.
“야, 이거 진짜 비밀이다.”
“어어.”
“나 김은오 좋아하는 거 같아.”
“헐.”
“야야, 도와줄 거지?”
“걔 번호는 아냐? 걔 학교 어디 됐대?”
“공전. 우리랑 같아.”
“와 대박이다. 야, 근데 걔 어디가 좋냐?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중1 봄? 몰라. 암튼 야, 도와줄 거지?”
“당연하지. 친구 좋은 게 뭐냐, 야.”
지형이 유성 어깨에 한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살다 보면 가끔 전혀 기대하지 않은 환상적인 일이 완벽하게 터지곤 한다. 지금 유성이 그랬다. 은오와 지형과 같은 반이 된 유성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유성은 남자애들 한 무리에게 다가갔다.
“와, 너 진짜 개잘생겼다.”
완벽한 가르마 펌을 한 보통 키 남자애가 말했다. 명찰에 쓰여있었다, 김세훈.
“너 키 몇이야?”
시뻘건 틴트를 칠하고 에이치 라인 치마를 입은 긴 갈색 생머리 여자애들 셋이 다가왔다.
“팔십이.”
“오오, 목소리.”
유성이 웃었다. 가만히 주목하던 애들이 하나둘씩 모여오더니 이내 몰려들었다. 교실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리게 시끄러웠다.
“야, 너 최나윤 언니가 고백했는데 찼다며?”
번호를 교환하며 긴 갈색 생머리 여자애가 가까이 들이대고 물었다.
“어.”
“왜?”
“꿈 깨셈. 얘 꽂힌 애 있음.”
지형이 말하자 조용해지더니 잠시 후 소리가 왁자하게 터졌다.
“누구? 누군데?”
“어느 학교?”
“혹시 그 동열고 시연 언니?”
“언제부터?”
“고백했어?”
그때 유성이 말했다.
“우리 반이야.”
그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 야 누구냐?”
“야! 정유성 우리 반에 좋아하는 애 있대!”
“진짜 부럽다.”
“쟤 아니야? 그 고은새…?”
“아-! 누구야? 우리 반 계 탔다.”
복도까지 쩌렁쩌렁 소리가 터졌다.
“야! 야! 조용히 하고 자리로 간다!”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설마 김은오 좋아하는 애 있지는 않겠지?”
유성이 소곤소곤 말하자 지형은 낄낄대며 과자를 돼지처럼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럼 개웃기겠다. 불쌍한 놈, 완전 찍혔네. 누군지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