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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8.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열여섯 걸음

 국어시간 준비물이 공책이었다. 유성은 아침에 문구점에 들러 산 공책을 서랍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 은오야. 공책 두 개 샀어?”


 선생님이 말했다. 유성은 순간, 책상 위에 올려놨던 공책을 슬쩍 다시 집어넣었다.


 “자, 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

  선생님이 교탁에 서서 말했다. 유성은 손을 들었다.


 “어, 있네? 어...은오야, 혹시 공책 하나만 유성이 빌려줄래?”

  유성은 웃으며 은오에게 다가갔다. 은오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왼 손으로 책가방 속에서 파일을 꺼내 내밀었다. 유성은 받아들었다.


 <간절한 사랑> 김은오 장편소설.


 아무리 봐도 공책은 전혀 아니었다. 유성은 서랍 안에서 자기 공책을 도로 꺼내고 파일을 쳐다봤다. 인소 같았다. 유성은  웃으며 소설을 봤다.


 ‘정유성은 학교 최고 킹카였다. 황금비율 눈코입, 조각상 같은 옆선, 옆사람을 몽키로 만들어버리는 등신대를 가졌다.’


 유성은 깜짝 놀라 은오를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준 것 같지는 않았다.


 ‘식당에서 유성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뒤에서 후광이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말을 걸지 못했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쿵. 유성은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성은 집에 가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정독했다. 좀 심하게 오글거리긴 했지만 어떤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좋았다. 유성은 소설을 다시 파일에 넣어 장판 밑에 깔아두었다.





 오경아가 정유성과 사귄지 일주일 째였다. 경아가 고백을 했고 유성이 승낙했다. 그러나 여전히 연애가 아니라 짝사랑 같았다. 정유성은 세 시간 안에 답장을 하는 법이 없었다.


 “유성이 반에서는 어때?”


 경아가 은오에게 물었다. 유성과 친하지 않은 은오는 머리를 쥐어짰다.


 “음…시끄러운 것 같아.”


 “또 똑같은 소리 말고 새로운 거 없어?”


 “그냥 별 거 없어. 아, 좀 웃겨.”


 “아, 뭐야. 관찰 좀 자세히 해 줘봐.”


 오늘부로 중학교 3학년 동아리는 마감이었다. 경아와 은오는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유성을 좋아하는 경아는 유성과 같은 반인 은오를 찍었다. 동아리가 끝나자 경아는 은오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배정이 한창이던 무렵 유성이 경아에게 물었다.


 “너 친구들 중에 나랑 같은 고등학교인 애 누구누구지?”


 “어어, 글쎄. 그…음…”


 “너 친구들 누구누구 있지? 오현지, 김소연, 박현정, 김지민, 또……아, 걔. 우리 반. 김은오.”


 “현지는 상전 됐다 그랬고, 소연이랑 현정이는 목상고. 은오는 몰라. 안 물어봤어.”


 “친하지 않아?”


 “그렇긴한데……음.”


 그때 처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미약해서 넘어갔다.


 졸업식 날, 졸업식이 막 시작될 때 애들이 수군거렸다.


 “야, 왜 김은오랑 정유성이랑 같이 들어오냐?”


 경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그 애들이 보는 곳을 봤다. 은오는 뒤쪽 자리에 있었고 유성은 앞쪽 자리로 가고 있었지만 같이 들어온 걸 알 수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김은오와 정유성은 친하지 않았다.


 김은오가 남몰래 경아 남자친구를 짝사랑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둘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순간 과대한 생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유성은 전혀 오경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왜 고백을 받아줬을까? 정유성 주변에 차고 넘치는 게 여자였다. 경아도 정유성이 자기 고백을 받아줬을 때 너무 뜻밖이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고백한 지 일주일이나 지나서 체념한 뒤였을 때 말이다.


 수상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경아는 은오가 자기와 유성과 같은 학교임을 알았다. 왜 괜히 그 사실이 거슬렸을까? 심지어 은오와 유성이 같은 반이 됐다는 걸 알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거세졌다.


 너 6반이지?


 경아는 유성에게 문자를 보냈다. 역시 답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이 지나도.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답이 없네ㅠㅠ 내 친구 은오도 6반인데


 바로 답장이 왔다.


 응ㅋㅋ 맞아 같은 반이더라


 어두운 기운이 마음을 덮쳤다.




 “정유성 걔 여친 있지 않냐?”


 며칠 후. 옆자리에 앉은 은서가 앞에 앉은 서희에게 말했다.


 “몰라. 있다는 거 같은데. 이름이…….”


 경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솟았다.


 “……김은호? 랬나?”


 경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은, ‘오’. 걔랑 안 사귀어. 여친 따로 있다고 애들이 그러던데.”


 “그럼 김은오는 뭐야?”


 “그러니까. 지 여친 놔두고. 아무튼 진짜 김은오 계 탔다. 개 부럽다.”


 “김은오가 왜?”


 경아가 끼어들어 물었다. 은서가 말했다.


 “정유성이 김은오 좋아한다고 다른 반 애들이 그러던데.”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근데 솔직히 존나 정유성이 아깝지 않냐?”


 은서가 킥킥거리며 물었다.


 “완전.”


 경아가 대답했다.


 경아는 유성에게 연락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정유성은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경아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공허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야, 진짜 정유성이 김은오 좋아한대?”


 같은 반 수정이 승요에게 물었다. 승요가 관심 없다는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근데 정유성 경아랑 사귀잖아.”


 승요가 말하고 경아를 돌아봤다. 경아가 고개를 들었다.


 “경아야, 정유성이랑 헤어졌어?”


 승요가 묻자 수정도 경아를 돌아보았다. 경아는 망설였다. 거의 헤어지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결국 경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승요가 헉, 하고 말했다.


 “왜? 김은오 때문에?”


 경아는 허허 웃어 보였다.


 “미친 거 아니야? 야, 김은오 미친년 아니냐?”


 승요가 수정에게 말했다.


 “미친년이지. 왜 여친 있는 애를 건드려? 이해할 수가 없다. 경아 너무 불쌍하다.”


 “아니……불쌍한 정도가 아니지, 존나. 와, 내가 다 화나네?”


 “경아야, 내가 가서 따져주고 올까?”


 “아니, 아니. 괜찮아.”


 경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너 이젠 정유성 안 좋아하지?”


 승요가 묻자 수정은 아무 대답 없었다.


 “너 아직도 좋아하냐?”


 “근데 걔 좋아하는 애들 태반이잖아. 나만 그런 거 아니야.”


 “허어어억.”

  “너도 옛날에 정유성 좋다고 그랬잖아?”


 “옛날에 잠깐. 야, 조용히 해.”


 승요는 같은 반인 남친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난 김은오 되게 별로던데.”


 수정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런가?”


 은오는 자기가 지금 이렇게 유명한 화젯거리란 걸 알고 있을까? 경아는 궁금해졌다.


 그날 화학실 앞 복도에서 정유성을 마주쳤다.


 정유성이 맞은편 멀리에서 오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둘은 말없이 헤어진 상태나 다름없었다. 망설이며 걷는데 정유성이 웃으며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가왔다. 한쪽 팔을 경아 어깨에 척 걸쳤다. 정유성은 좋아하거나 미안하면 이런 식으로 인사했다. 그에 따라 팔의 강도도 올라갔다. 지금 경아 경우엔 후자였다. 열 받게 그 조차에도 설렜다.


 그렇게 정유성과 헤어졌다. 짧은 연애였다. 아니 연애라는 연극을 끝낸 기분이었다. 경아는 책상 위 팔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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