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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8.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열일곱 걸음

 청소 당번인 유성은 화장실에서 빤 대걸레를 들고 교실로 돌아왔다. 은오 자리를 지나다가 멈칫 섰다. 유행이 한참 지난 은오 핸드폰이 책상에 놓여져 있었다.


 장난감처럼 조그만 핸드폰을 들어 켜봤다. 잠금화면에 뜬 빨간 풍선을 눌렀다.


 삐요오오옹? 파앙! 요란한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유성은 화들짝 놀라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뭐야.”

  친구들이 유성을 보며 웃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유성은 친구들을 따돌리고 몰래 문자기록에 들어가 봤다. 방금 아빠와 한 문자가 맨 위에 있었다. 이상했다. 아빠와 주고받은 문자라곤 죄 자기 혼자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들이었다.


 2012년 2월 9일, 아빠 뭐해? 학원 가기 싫어 치킨 먹고 싶어


 2012년 3월 27일, 보고싶어


 2012년 4월 10일, 아빠, 나 힘들어…반에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맨날 밥도 혼자 먹어. 수행평가 때도 맨날 나 혼자 남아서 누가 데려가 줄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그래도 학교보다 집이 더 싫어. 무인도에 낙오된 기분이야.


 유성은 말없이 읽기만 했다. 가장 최근에 보낸 문자는 바로 방금 전에 보낸 문자였다. ‘치킨 먹고 싶어’.     




 “야, 그냥 고백을 하라고! 걔 무조건 오케이 할 거라니까?”


 재원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지형네 아파트에 지형, 유성, 세훈, 현수, 재원이 모여있었다.


 “지형이 좋아한대잖아.”


 세훈이 누운 채 sns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얼굴이면 넘어와.”


 “아, 몰라. 걔 나 싫어해.”


 유성이 베개를 끌어안았다.


 “뭔 근거로?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야, 모르겠냐? 얘가 히스테리 허벌나게 부려댔잖아.”


 얼굴을 가린 폰을 아래로 내리며 세훈이 말하자 재원이 입맛을 다셨다.


 “걔 내가 딱 보니까 니 무서워서 피해 다녀.” 세훈이 한술 더 떴다.


 “야, 그런 애들은 지한테 얌전하게 잘해주는 애 좋아한다니까? 너같이 시종일관 살벌하게 시끄러운 고장난 비상벨 말고?”


 “지형이 안 얌전한데 쟨 왜 좋아하는데.”


 재원에게 묻는 세훈 말에 지형은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수학 수행평가...? 설마.”


 “어?”


 유성이 되묻자 지형이 고개를 저었다. 유성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형아.”


 돌연 얼굴을 번쩍 들고 유성이 말했다.


 “너 여친 사귀어주면 안 되냐?”


 “누구랑?”


 “그냥 아무나 지금 사귀자고 하면 당장 되는 애.”


 “그런 애가 어디 있어.”


 세훈이 웃으며 휴지조각을 유성에게 던졌다.


 “이왕이면 길게 사귈 수 있는 애로. 김은오 나한테 넘어올 때까지.”


 그런 애가 어디 있어, 넷이 한꺼번에 유성에게 말했다.


 “야, 난 된다고 봄. 가능성 있어. 생각나냐? 중3 때. 김장미 남친 사귀니까 이재원 낙담해가지고 웬 중2짜리가 고백하니까 사귀었잖아.”


 “그 얘길 왜 꺼내.”


 재원이 세훈이 던진 휴지조각을 집어 지형에게 던졌다. 유성이 진지한 얼굴로 베개에 턱을 받쳤다.


 “야, 지형아. 얘 불쌍한데 좀 도와줘라.”


 재원이 말하며 킥킥 웃었다.


 “평소에 우리반에 마음에 드는 애 없었어?”


 “설마 김은오는 아니겠지.”


 세훈이 웃으며 말할 때 유성 눈빛이 번뜩 달라지는 걸 지형은 봤다.


 “절대 아니다. 난 진짜 쟤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어디가 좋은 거야.”


 지형이 말하자 유성이 활짝 웃으며 푸하하 웃었다.


 “야, 야. 앉아봐. 재밌다.”


 세훈이 웃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섯은 둥그렇게 모였다.


 “일단 니네 반에서 제일 예쁜 애가 누구지?”


 “고은새.”


 “인정.”


 “난 걔 괜찮던데. 엄지은.”


 “걘 안 돼. 전성혁이랑 떠서 살아날 자신 있냐?”


 “그럼 고은새?”


 유성을 뺀 셋이 대답을 기다리며 지형을 쳐다봤다.


 “설마 나보고 지금 고은새한테 고백하라고?”


 셋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미쳤나봐, 진짜!”


 “야, 유성이 불쌍한데 한 번 도와줘라.”


 “차이면! 아니 너네 왜 유성이만 생각하냐?”


 “아, 하긴 그래.”


 재원이 말하고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유성이 말했다. 지형이 유성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이 빨갰다.


 20분 동안 다섯 중 하나는 베개를 껴안고 말없이 누웠고 하나는 앉아서 핸드폰만 만졌고 셋은 졸았다.


 “……헐, 야.”


 한참 핸드폰을 만지던 지형이 고요를 깨자 넷이 주목했다.


 “나 고은새랑 사귐.”


 껴안고 있던 베개를 천장 구석에 집어던지고 유성이 벌떡 일어났다. 다섯은 일제히 지형의 핸드폰을 봤다.


 “우오오!”


 셋이 소리쳤다. 유성 표정이 상기되었다. 벌써 김은오랑 사귄 듯했다. 지형은 얼떨떨한 표정이다가 이내 생색내기 시작했다.


 “와, 씨. 내가 진짜 친구 땜에 진짜.”


 이십 분 동안 자존심과 우정 사이에서 살벌하게 갈등한 지형은 앞머리를 마구 쓸어올렸다. 유성은 감격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다가와 지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사랑한다. 지형아. 진짜 안 잊을게. 진짜.”


 “야, 씨. 내일 니 고백해라, 어? 김은오한테!” 지형이 소리쳤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하면 니…! 야, 그러면 진짜 다구리 까자.”


 “우리는 뭔 얼어죽을 우리야, 내가 했지!”


 아 그렇지, 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내일 우리 학교 가자마자 시끄럽게 떠드는 거다. 지형이 고은새랑 사귄다고.”


 현수 말에 세훈과 재원이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야, 야. 절 받아.”


 유성이 벌떡 일어나 지형 앞에 넙죽 엎드리자 다 신나게 웃었다.


 “내일 아니면 기회도 없어. 방학식이잖아.”


 현수가 말했다.               




 은새는 학원수업을 마치고 로비에 지우와 앉았다. 문자가 왔다.


 “야, 나 이지형이 문자 보냄.”


 “뭐래?”


 “몰라. 그냥 이름 불러.”


 왜, 라고 답장하고 지우와 수다를 떨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확인한 은새가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지우에게 보였다.


 “야, 이거 봐.”


 ‘사귀자’


 지우가 풉 웃음을 터뜨리며 핸드폰을 가져갔다.


 ‘갑자기 뭔 개솔’


 지우가 보냈다. 은새가 쿡쿡 웃었다.


 “은새야! 이리 좀 와볼래?”


 선생님이 부르자 은새는 교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지형에게서 답장이 왔다.


 ‘좋아함’


 지우가 놀라 멀리서 폰을 들어 보이며 다급하게 흔들었다. 은새가 손짓으로 말을 전했다.


 “아, 받아주라고?”


 지우가 말하며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자 은새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지우는 답장을 했다.


 “줘봐.”


 은새가 나왔다. 폰을 받아들더니 우뚝 멈춰 서고 입을 뜨악 벌렸다.


 “왜?”


 “아니, 거절하라니까!”


 지우가 숨을 헉 들이마셨다.


 “내가 받아줘? 그러니까 동그라미 만들길래.”


 “악, 아니…! 악, 차라는 소린 줄 알았어.”


 “헉. 야, 미안.”


 잠깐 말 없던 은새가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 됐어. 그냥 좀 사귀는 척하다가 헤어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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