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화이트-방부제 먹는 미인

-행복을 보존하는 나만의 방법-

by 유니크한J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내 행복을, 일으켜야만 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마카롱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료사고라는 불가항력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작은 일에서부터 기쁨을 되찾겠다는 의지는 내 선택이었다. 쏟아진 행복을 다시 주워 담으려 결심하니, 사소한 소식조차 첫눈처럼 반가웠다.


남편과 함께 들른 가게는 하얀 외관에 반짝이는 통창이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달려와 코끝에 매달렸다. 알록달록 파스텔 옷을 입은 마카롱들이 통통한 몸매를 흔들며 웃고 있는 듯 재잘거렸다. 오픈 기념 할인 소식에 다양한 맛을 하얀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으며 생각했다. 행복을 담는 일이 이렇게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집어든 마카롱은 '씨솔트 캐러멜', 단맛과 짠맛 그 경계를 아찔하게 넘나드는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마치 불행과 행복이 한 솥에 뒤엉켜 구분되지 않는 맛 같았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도 결국 미세한 한 끝 차이에서 오는 건 아닐까? 마카롱을 베어 물며 생각했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갔다. 오늘은 남편에게 오랜만에 요리를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날이다. 그래서 비교적 쉬운 떡만둣국을 생각해 냈다. 남편은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가고 혼자 차분하게 떡만둣국 끓이기를 시작했다.


하얀 떡국 떡들이 찬물에 퐁당퐁당 빠지며 자태를 뽐냈다. 냉탕에서 몸을 불리는 동안, 나는 육수를 준비했다. 팔팔 끓는 소리는 눈보다 먼저 반응한다. 약불로 줄인 뒤 준비한 떡과 만두를 조심스레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주방을 채웠다. 풀어둔 계란물을 넣자 뜨거운 김이 얼굴로 확 올라왔다. 제법 근사한 향이 퍼졌다. 흰 떡국의 마침표는 참기름 한 방울


'톡'


"와. 냄새가 너무 좋네"


때마침 남편이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국자로 휘휘 저으니 담기는 무게감이 아주 적절하다. 국물 양도 이만하면 완벽해서 어깨를 으쓱하며 남편과 자리를 바꿨다. 언젠가부터 뜨거운 국이나 음식을 가지런히 담는 일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신혼 때부터 마음에 들어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식탁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데 남편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오~ 노~!! 여보!!!!!!”


그날 국물 속에는 원치 않던 불청객이 함께 끓고 있었다. 그럴듯하게 완성된 하얀 떡국 위로 파란 봉우리 하나가 둥둥 떠올랐다. 네모난 봉지에 쓰여 있던 작은 글씨, 파란색 경고문.


‘먹지 마세요! 실리카겔.’


남편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모든 게 완벽하고 순조롭다고 생각했었는데... 빵빵했던 어깨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이것도 못 하는 인생이 되었나 싶어 자책하는 마음이 슬슬 시동을 걸었다. 의기양양하게 걸어와 몸집을 부풀린 자기 연민의 감정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거 봐! 이게 현실이야, 알겠니?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두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행복을 주워 담겠노라 당당하게 외치던 내가 아니었던가? 바람 빠진 다짐은 뽀얀 떡국과 함께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쏟아져 버렸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남편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여보라고 완벽할 순 없잖아.”


그날 결국 떡국은 먹지 못했다. 하얀 바탕 위의 작은 점 하나는 유독 더 선명하게 티가 난다. 작은 실수 하나가 겨우 일으켜 세운 내 하루를 무너뜨리는 게 싫었다.


계획에 없던 외식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마침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내 목소리가 시무룩한 걸 눈치챈 동생은 실수담을 듣더니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언니 동안 피부 비결이 그거였구만! 방부제 먹고 오래오래 살아서 좋겠다.”


나도 함께 웃었다. 가족들의 다정함이 포근한 함박눈처럼 겹겹이 덮였다. 그날의 실수도 내려앉은 함박눈과 함께 사르르 녹았다.


원치 않던 것들이 불쑥 들어와 삶에 섞이는 순간들이 있다. 한 방울의 불완전함이 잘 차려진 행복 위에 떨어지는 순간, 그때부터는 내 선택의 시간이다. 행복을 재발견하는 촉매제로 사용할 것인가? 자책하며 스스로를 끌어내리는 침전물로 남길 것인가?


나의 약함이 삶의 작은 얼룩은 될 수 있어도, 삶을 무너뜨리는 미세한 균열로 이어지는 건 결국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찾아왔다. 흰색은 흠집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는 색이지만, 동시에 그 흠집마저도 품어내는 색이다. 얼룩이 남으면 남은 대로, 흰 도화지 위에는 새로운 색이 스며든다. 새로운 삶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처럼 쌓였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수많은 나날들 속에서, 나는 수없이 실수할 것이다. 그러나 약함을 딛고 일어섰던 하루는 나의 행복을 오래도록 보존해 주는 방부제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선택한다. 완벽을 쫒는 삶보다, 하얀 식탁 위에 내 존재 그대로의 모습과 웃음을 함께 올려놓는 삶. 그러니 나는 오늘도 기꺼이 고백하고 싶다.


나는, 방부제 먹는 미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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