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이트-초보 시각장애인의 UDT급 기차 탈출기

시각장애인의 현생 적응기

by 유니크한J

시각장애인이 혼자 기차를 탈 수 있을까?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바로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방학이다. 방학이 되면 나 역시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단짝들, 자칭 ‘에프포(플라워 4송이)’라 불렀던 친구들이다. 우리는 해마다 두 번은 반드시 만난다.


이번엔 추운 1월 중순,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 시청역 근처에 괜찮은 숙소를 잡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고, 수다 떨고, 또 먹고, 또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 사이엔 화려한 여행지도 필요 없었다. 아늑한 숙소와 먹을거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간 자기 만의 유리병에 꾹꾹 눌러 담아 온 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때로는 눈물 쏙 빠지게 매운맛이었고, 때로는 구수한 숭늉 같았으며, 어느 순간엔 배꼽 빠질 만큼 달달했다.


그날도 우리 넷은 숙소에서만 꼬박 1박 2일을 보내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서로가 사는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기차를 혼자 타야 했다.


시각장애인이 혼자 기차를 이용할 때는 교통 약자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안내 서비스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출발역에서는 기차 좌석까지, 도착역에서는 하차 후 택시 승강장까지 직원이 일대 일로 안내해 주는 서비스다. 시각장애인에게는 혼자서도 기차를 이용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아주 유용한 제도였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기차든 비행기든 혼자서도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이 제도를 익숙히 이용하고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해 안내 데스크에 기차표를 내밀고 서비스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쩐지 이상했다. 직원은 허둥지둥 메모를 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느낌이 쎄~했다.


“제가 서울역에서 울산역으로 가요. 꼭 울산역에도 안내 서비스 신청 부탁드려요!”


신신당부하듯 다시 한번 강조하고, 나는 플랫폼으로 향했다. 모든 걸 확인했지만 뭔가 모르게 찜찜했다.


2시간 반 정도 지나 울산역 도착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언젠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만약… 아무도 안내하러 오지 않으면 나는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 그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방송은 끝났고, 기차는 멈춰 있었지만 승무원도, 직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입 안은 바짝 말랐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차례 상상 속에서 UDT 특전사 지옥 훈련급 탈출 시나리오를 반복해 왔던 사람이 아닌가? 가방을 챙기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우아하게 일어섰다.


기차에서 내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고 좁은 복도를 조심히 따라 걸으면 어디선가 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방향으로 열린 문이 출구였다. 손잡이를 찾아 잡고 천천히 발을 내딛어 육지 착륙에 성공했다.


1월의 바람은 얼굴을 베는 듯 차가웠다. 플랫폼에 내린 다른 승객들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는 하나같이 에스컬레이터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나를 맞이해야 할 직원은 없었다. 하행선 플랫폼엔 덩그러니 나 혼자 남았다.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숨죽이고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시각장애인 쌩초보였다면 불안해서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필시 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했을 테고,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수년간 단련된 중초보는 되었다.


곧바로 코레일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춥기도 했고, 살짝 서럽기도 해서 떨릴뻔한 목소리를 간신히 꾹 삼키고 자초지종을 말했다. 직원은 화들짝 놀라 급히 울산역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참고 참았지만 결국 불편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확인해 달라고 했는데…’ 하는 짜증과 ‘그래, 실수할 수도 있지…’ 하는 이해심이 내 안에서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둔탁하고 급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발소리가 반가웠지만 나는 애써 무표정을 선택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기차 문 앞에서 기다렸는데 고객님을 못 찾아 역사 쪽으로 다시 내려갔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흰 지팡이는 쓰지 않더라도 혼자 이동할 때는 꼭 가방에 넣고 다니세요.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세상에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중도 시각장애인 재활 교육 당시 보행 교육을 담당했던 선생님의 말이다.


'내가 시각장애인인지 세상에 왜 알려야 하지?'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오늘, 그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책임은 직원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나의 부주의도 분명 있었다.


“너무 추우셨죠? 이거 받으세요.”


직원은 내가 잡을 수 있도록 한쪽 팔을 내어 주는 대신 먼저 작은 손난로 하나를 조심스레 건넸다. 너무 따뜻해서, 불평은 그대로 사르르 녹아버렸다. 기차 안에서도 아무런 안내가 없었던 걸로 봐서 분명 중간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건 팩트였다.


사람이 하는 일은 완벽할 수 없다는 마음이 결국 이겼다. 내가 이 분께 불평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도 찾아왔다.


“택시가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어요. 조금 서둘러서 내려가요.”


나는 혼자 울산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흰 지팡이를 가방에 넣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과 직원들 간 소통에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그 작고 하얀 신호가 나를 세상과 '정확하게 이어주는 약속'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젠 코레일 어플에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직원을 호출할 수 있는 버튼도 생겼다. 이제 특전사급 탈출 시도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앞으로도 예기치 못한 두려움과 돌발 상황은 분명 또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삶이 당장은 안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나다운 삶이 아니다.


두려움은 언제든 찾아오지만, 나는 그 두려움을 안고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어둠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세상과 끝내 이어지려는 나의 다짐이자 호흡이다.”


나는 오늘도 어둠 속을 성큼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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