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매번 겨울, 10글자에 무너지는 기분을 그만 느끼고 싶었다.
누군가가 도전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성취는커녕, 무력감과 불안감만 남아있었다.
행동에 활기를 넣고 싶었다.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난 8년 만에 임용고시를 포기할 수 있었다.
- 하루에 10시간 이상의 공부 시간을 채우는 것.
- 아프더라도 참고 공부하는 것.
- 잠을 4시간 만을 자는 것.
-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듣기 등 취미생활을 일절 하지 않는 것.
- 카카오톡과 유튜브를 지우고, 독서실에 갈 때는 휴대전화를 들고 가지 않는 것.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다. 선한 행동들을 매일하고 있으니, 그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맹신했다. 매일매일 공부 시간과 휴식 시간을 체크해 가며 작성하고, 하루의 등급을 매겼다. 스스로가 만족하는 A인 날에는 안도했지만, C인 날에는 다음날 3시간 더 공부하는 벌을 내렸다. 그렇게 매일매일 기록당했고, 감시당했다. 아무도 철창을 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철창을 치고, 교도관이 되어 죄수인 나를 혼냈고, 죄수가 되어 교도관의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 눈치 보고, 눈치 받으며 살았다. 그렇게 살면 분명 출소될 것이라고, 어쩌면 가석방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와 정말 재미있다.”
감옥에서 나온 죄수가 처음으로 세상을 경험했다. 야외에서 하는 뮤직페스티벌 공연을 관람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기다리던 가수가 나왔다. 공연장에서 물을 뿌려 온몸이 홀딱 젖었을 때, 도파민이 터졌다. 1시간 30분을 미친 듯이 뛰며 놀았다. 경주, 일산, 부산, 수원, 춘천 등 더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싶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름의 해운대가 어떤지 알게 되었고,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눈물이 났다. 이렇게 사람 좋아하고, 잘 놀 수 있는 아이를 8년 동안 가둬놨으니, 그 아이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을까, 미안했다.
한 걸음 물러난 채로 수험생 시절의 나를 바라보면 참 무모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차근차근 모아둔 청약통장을 해지해 가며 강의료를 냈고, 친구들에게 오는 모든 연락을 무시했고, 세상과 단절된 채로 한 달에 15만 원으로 생활했다. 그 15만 원은 공부에 방해되는 잠을 깨부수기 위한 커피값으로 소비되었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울며 스탠딩 책상에서 공부했고, 부모님의 주름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 운동, 콘서트, 여행, 연애, 영어, 효도......
“합격 후에”로 모든 시간을 멈춰놨다. 나의 시계는 오로지 합격이 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의 난 도박꾼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판만 하면 그동안 잃은 거 다 원상복구 할 수 있다고 합리화하며 현실을 포기하고, 매번 “한 판만 더, 한 번만 더.” 그렇게 생활했다.
오늘 난, 출근할 곳이 있고 그곳을 운전해서 갈 수 있다.매주 월요일은 수험 생활로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체형 교정 센터에 간다. 얼마 전 한 소개팅이 잘되지 않아 슬펐고, 다음 주에는 최애 그룹의 티켓팅이 있다. 더는 ‘00 후로’ 무언가를 미뤄두지 않는다. 합격 후로 미뤄둔 내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 그때의 나한테 미안해서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늘 마음 한구석에 있던 ‘작가’란 꿈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때 “소원이는 솔직한 글쓰기를 참 잘하는구나.”라고 칭찬 받았던 것, 고등학교 문학시간 독후감 과제에서 만점을 받았던 것, 임용고시에서조차 논술은 항상 고득점을 유지했던 것. 어쩌면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지도 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고신이 난다. 행복하게 꿈꿀 수 있음에 감사하다.
22살의 나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렁차게 세상을 호령하겠다며 달려왔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철딱서니가 없었다.
2월이면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의 기간제 교사 계약이 만료된다. 또 한 번, 면접을 보러 다닐 생각에 기운이 빠지고, 언제까지 나를 어필만 해야 할까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힘든 과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전에 내가 겪어본 적이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묘하게 안심이 된다. 면접과 통보의 연속일 것이라는 것, 어쩌면 지난번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것. 세상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 속에서 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펼쳐지는 상황들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다시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다 해도, 그곳에서도 진다 해도 괜찮다.
어차피 8번 실패한 거, 한 번 더 실패하지 뭐.
*제목은 DAY6(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사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