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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Jun 02. 2024

가을에 아름다웠던 그 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회상의 공간으로 지워지지 않는 길이 놓여 있다. 서울의 가을에 눈물겹게 아름다웠던 길이다. 눈 감으면 더욱 뚜렷이 다가오는 길, 두 손으로 밀어내도, 온몸으로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길이다. 가을이면 슬며시 다가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길을 이젠 아끼는 가리개처럼, 글방 서가 옆에 걸었던 한 폭 민화같이, 어디 눈이 늘 머무는 곳에 걸어놓고 지낼 작정이다.



마흔 살 고비를 돌아 나올 무렵, 고향을 떠나 서울서 학원강사를 할 때였다.



낯선 도시에서 단과에 뛰어들어 프로 강사들과 경쟁하자니 쉽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반포에서 서대문구 학원까지 출근해 네 시간 강의를 하고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야간 강의 한 시간을 위해 밤늦은 시간에 오가야 했다. 수강생마저 적어 정신적으로 부대꼈다. 내겐 대학 진학을 앞둔 두 아들이 있었다. 서울은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억척스레 하노라면 좋아지겠지 했지만, 상황 호전은 뜻 같지 않았다.



결국 몸이 망가져 병을 얻었다. 병명은 급성 폐결핵. 식은땀이 흐르며 숨이 가쁘고 몸이 처지더니, 급기야 올 게 왔다. 심한 기침을 동반한 각혈이 이어졌다. 병 앞에 무력한 게 사람이다. 광활한 서울 한복판에 횅댕그렁하게 가족을 데려다 놓고 가장이란 사람이 숨을 할딱거리고 있다니…. 대학 갈 새파란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 40대 젊은 가장이 이 무슨 꼬락서니인가.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으며 버틸 게 아님을 직감했다.



잽싸게 움직였다. 지인과 연이 닿아 호흡기질환에 권위자라는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연대 출신의 이욱용내과. 학원이 있는 서대문구와는 접경이라 오전 강의를 끝내고 치료받은 후 집에 가 쉬다 야간 강의를 하면 좋겠다고 시간 계획을 짜가며 치료에 들어갔다.



병원은 두려운 곳이다. 심박이 요동치고 숨이 가빴다. ‘내가 중병에 걸리다니 어서 길을 찾아야 할 텐데….’



시간에 맞춰 학원에 온 아내와 함께 합정동 이 내과 초행길에 올랐다. 길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소스리바람에 큰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수북이 쌓인 잎과 떨어지는 황금빛 잎으로 길이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땅 위에도 노란 잎, 길섶 양쪽으로 줄 선 가로수에도 그리고 허공에도 줄곧 내리는 난분분한 노란 잎들의 춤사위….



오가는 차들마저 노란 순금빛 길 위에서 속도를 줄이며 환상의 풍경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천인 은행잎은 처음이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길이었다. 서울에도 이렇게 찬란한 가을이 내리는가. 낙엽이 이토록 선연할 수 있다니, 왠지 불끈 힘이 솟았다.



의사는 선연(善緣)이었고, 아내의 정성 어린 몸 보양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신사동의 종합반으로 옮기면서 점차 생활도 안정됐다. 전광판에 허옇게 비친 폐를 가리키며, “상태가 이렇군요.”라던 충격만큼 완치에 환호했다.



법인이 바뀌면서 이사장으로부터 학교로 복귀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있던 학교로의 귀환이다. 귀향길에 섰다.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다. 환상 같다. 바로 내게 내린 암묵적 계시였던 마포구 합정동 내과로 가던 길, 노란 은행잎이 무더기로 덮였던 그 길을 차마,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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