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초파리와의 전쟁 (삿포로의 여름)
일본으로 떠나 혼자 살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외롭지도 않았고, 집안일도 어차피 혼자 사니까 나의 관대한 기준에 맞추어 하면 되어서 그럭저럭 할만했다. 의외로 일본생활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벌레와의 전쟁" 이 3할이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어렸을적엔 소독회사를 다니셨고, 지금도 청소와 경비 인력회사를 포함한 소독회사를 운영하신다. 그래서 우리집은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대대적인 소독을 했었고 여행에 다녀오면 벌레들이 배를 까고 몰살 당해있는 장면을 보곤 했다. 집에 전문가가 있다보니 모기나 파리 외에 집안에서 벌레를 볼 일도 잘 없었고, 보통 엄마나 아빠의 손을 빌려 잡았기 때문에 내 손으로 처리할 일도 없었다. 어렸을 적에 궁금해서 잡아본 어여쁜 흰색나비도 가까이서 보면 흉측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곤충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혐오하는 벌레와 일정한 거리 유지가 가능하였는데, 그런 내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벌레와의 전쟁'은 정해진 운명이자 신이 주신 미션처럼 내게 다가왔다.
나의 1차 벌레와의 전쟁은 여름 빼고는 눈이 와서 벌레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 삿포로의 여름이었다. 물론 삿포로와 여름은 잘못이 없다. 나의 미숙함과 게으름이 문제였다.
삿포로의 호텔로 파견되어 처음으로 묵었던 싱글룸크기의 레지던스에서 나는 집안일이라는 걸 거의 처음 해본 것 같다. 가전제품들이 풀옵션으로 갖추어진 곳이었는데,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창피하게도, 밥솥과 세탁기를 처음 사용해보았고 분리수거도 처음 해보았다. 가전제품이야 워낙 기술이 발달하여 설명서가 없어도 직관적으로 버튼 몇 개만 눌러보면 뚝딱 익힐 수 있다지만, 쓰레기가 문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쓰레기를 모에루고미(타는 쓰레기), 모에나이고미(타지 않는 쓰레기), 리사이쿠르(종류별 재활용쓰레기), 나마고미(음식물쓰레기)로 구분하여 지정된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린다. 이중 여름에 특히 제일 신경써야 하는 쓰레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음식물쓰레기다. 혼자 살다보니 요리할 일도 잘 없고, 음식물쓰레기가 한 번에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음식물쓰레기가 지정봉투 안에 가득 찰 때까지 집안에 두게 되었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초파리가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늘어났다.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왔다. 지금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리가 간지럽다.(눈물) 급한대로 근처 다이소에서 파는 초파리트랩을 사서 설치해보았는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날잡고 이 초파리들을 퇴치해야겠다 하여, 퇴근 후 전쟁에 들어갔는데.. 잡다가잡다가 근원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택배상자 아래.. (눈물)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지만 혐오주의>
초파리 애벌레들과 알이 흩뿌려져 있는 초파리마을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지만 내가 앞으로도 지낼 곳인데, 내가 해결해야지 누가 해결하겠어.. (눈물)

초파리 스프레이를 뿌리고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티슈로 닦아내면서 알과 애벌레들을 쓰레기봉투에 넣고는 얼른 밖에 내다버렸다. 날라다니는 초파리들은 눈에 띄는 건 초파리 스프레이와 맨손 스파이크로 왠만큼 잡은 후, 초파리트랩을 2개 정도 만들어서 배치해두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직접 만들 수 있는 식초트랩이었는데, 식초+설탕+주방세제+과일껍질을 섞어 (바로 버릴 수 있는)일회용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컵에 넣고 랩으로 싼 다음, 고무줄 같은 것으로 고정하고 젓가락으로 초파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내주면 된다.
택배 상자들은 도쿄에서 삿포로로 올 때 보낸 내 옷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따로 수납장이 없어서 상자에 넣어 놓은 채로 생활했었다. 초파리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준 상자였으니 당연히 능지처참해야했다. 안에 들어 있던 옷들도 아무래도 께름칙해서 전부 세탁기를 돌렸다. 초파리가 숨어있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다 훑어 보고, 샤워까지 한 후에야 나는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며칠간은 게을리 했던 바닥청소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택배상자는 바로바로 버리는 습관이 생겼으며, 음식물쓰레기는 꽉 찰 때까지 지퍼락에 넣어 냉동실에 얼려 놓는 습관이 생겼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한국에서 면세점 알바를 했을 때도 그랬지만, 호텔의 서비스직도 계속 서있어야 하는 일이라서 집에 오면 정말 뻗어 있고만 싶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배고픔뿐이었기 때문에 요리와 설거지, 장보기는 꾸준히 했지만 청소와 정리는 멀리 해왔었다. 그런데 배고픔 다음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벌레에 대한 혐오"였다. 사실 삿포로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금방 눈이 내릴만큼 추워졌고 벌레에선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청소와 정리는 다시 금방 게을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오키나와로 파견되고 나서는 1차 전쟁보다 더 큰 2차 전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2차 전쟁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