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치한과 정중한 변태
운동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여자치고는 키도 크고(172) 건장한 편이어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치한을 만난 적이 없다. 여기서 치한이란 바바리맨이나 여자들의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 치한이란 작자들도 왠만한 용기 없이는 안전빵으로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여자들이나 술취한 여성을 타깃으로 하겠지. 그래서 일본에 치한이 많다고는 들었어도 일본남자 평균신장보다 큰 나를 건드릴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파견근무했던 삿포로의 호텔은 고층건물로 방이 많아서, 외국인그룹투어 손님이나 일본 전국에서 수학여행손님들이 꽤 자주 오곤 했다.(삿포로는 일본의 인기 있는 수학여행지다.) 수학여행 예약의 경우 버스가 많으면 10대는 오기 때문에 다른 개인 손님들과 겹쳐서 엘레베이터 앞에서 오래 대기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엘레베이터를 분리해서 해당 층으로 신속히 안내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묵는 층이 14층과 15층일 경우, 버스가 도착하면 학생들을 줄을 세우고 엘레베이터 2대를 마스터키로 독립운영해서 1층에서 14층과 15층으로만 직행안내한다.
그날은 중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는 날이었다. 엘레베이터 1대를 맡아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학생들로 가득찬 엘레베이터 안에서 유독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다. 엘레베이터 뒤쪽 가운데에 서서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엘레베이터에도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있길래 왕따를 당하나 싶어 좀 불쌍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층으로 안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엉덩이로 무언가 느껴졌다.
설마했는데, 그 왕따 남학생이 내 엉덩이에 손을 갖다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했지만 머릿속으로 사태 파악이 되고서 나는 바로.. 그 남학생의 팔에 주먹을 날렸다. 퍽!
그순간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남학생도 당황했는지 작고 통통한 몸으로 빨리도 도망쳤다.
일반 손님이었으면 경찰에 신고라도 했을텐데.. 상대는 중학생 남자애고, 따라가서 명찰이라도 찍어둬야 선생님들한테 얘기라도 할텐데, 나는 엘레베이터를 다시 1층으로 가져가야 했다.
부들부들... 분하지만 나는 일하는 중이다. 그런 애를 동정이나 하고 있던 내가 참 우스워지고 있었다. 중학생 찐따에게 당하다니..
그 아이도 꽤 놀랐을지도 모른다. 일본 여자들은 치한을 만나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테니까. 내 일본인 동료들 중에도 2명이나 대중교통 안에서 치한에게 당한 적이 있는데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오후 근무를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삿포로에서 살게 된 2번째 집은 집 자체는 신축에 혼자 살기 딱 좋은 구조와 크기였지만 역에서 집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눈 쌓인 길을 걷노라면 7분 정도 걸리는 거리가 10분도 넘게 걸리곤 했다. 역에서 나와 집쪽으로 가려면 쭉 가서 왼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밝은 편의점을 지나고 나면 가로등이 별로 없어 어두웠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는데, 저 앞에 검은 패딩에 후드모자를 눌러 쓴 나보다 덩치가 작아보이는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키는 아마 커봤자 165 정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보통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은 내 쪽이지, 일본 사람인 경우는 잘 없었기 때문에 뭐지? 길을 물어보려는 건가 했는데, 공손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아나따노 마에데 오나니오 시테모 이이데스까?"
번역하자면, "당신 앞에서 [오나니]를 해도 될까요?"인데,
처음 들어보는 단어여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이?" 네?
"아나따노 마에데 오나니오 시테모 이이데스까?"
다시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물어봤다.
"도-이우 이미데스까?" 무슨 뜻인가요?
그순간, 그 남자의 손이 자신의 중요부위 쪽을 향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변태일 거라는 느낌이 왔다.
"가이코구징다까라 돈나 이미까 와카리마셍" 외국인이라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얘기하고 나는 정말 몰라서 그냥 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뛰지는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코너를 돌았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쫓아오진 않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나자 안심이 되서 힘이 풀렸다.
폰으로 인터넷사전에 "오나니"가 뭔지 검색해봤다.
"나니"는 무엇이란 뜻인데, "오나니"는 뭐지?
아...
진짜 이거 보고 심장이 너무 뛰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면서 너무 무서워졌다.
내 앞에서 자위를 해도 되냐는 뜻이었다고..? ..
정말 덩치만 보면 내가 더 큰데도 불구하고, 그냥 길을 가다가 마주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앞으로 또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걱정도 됐다.
뒤를 돌아봤을 때 없었으니까 우리집이 어딘지는 못 봤겠지. 그건 다행이었지만, 퇴근길에 나타났으니 또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야 생각났지만 그 때 바로 경찰에 전화해서 신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한동안 그 길을 지나가는 날이면 검은 패딩을 입은 왜소한 남자가 없는지 주위를 살폈고, 비슷해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긴장되고 무서웠다.
한국에선 술취한 사람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나였는데, 일본은 아니다. 아마도 일본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건장한 여자들도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