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통한다
내가 삿포로의 호텔에서 벨서비스로 일하던 시기(2015~2019)는 그동안 열심히 해외에 홍보해오던 홋카이도가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시기였다. 정말 다양한 나라의 손님들이 있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여행프로그램에 홋카이도가 나왔던 것 같다. 설경을 보기 위한 겨울여행뿐 아니라, 비에이와 후라노 등 라일락과 메론으로 유명한 지역이 여름여행으로 인기가 많아졌다. 오사카와 비슷한 수준으로 번화가나 유명한 관광스팟에서는 거리에 치이는 게 한국인이었다. 실제로 살아보니 왜 이제야 인기가 많아졌나 싶을 정도로 홋카이도는 정말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엽서에 담길 정도로 자연이 정말 아름답고, 수온이 낮은 덕분에 해산물의 품질이 좋아서 정말 맛있다.(땟깔도 좋을뿐 아니라 신선함과 재료자체의 단맛이 레베루가 다름!) 게다가 삿포로는 프랑스 파리처럼 계획도시여서 오도리공원을 중심으로 주택가와 번화가가 깨끗하게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길을 찾기가 쉽고 삿포로역을 중심으로 JR과 버스 등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개인여행자가 여행하기에도 좋다.
그래서 우리 호텔에는 매일매일 그룹투어버스가 중국과 대만에서 3~4대, 한국에서도 1~2대는 오곤 했다. 대만 항공사 파일럿과 승무원들도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1번씩 들어왔다. 벨서비스에는 한국어를 잘 하는 일본인 동료 마리아가 있었지만, 한국인 직원은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손님들은 내가 한국말로 인사할 때마다 깜짝 놀라며 너무 반가워했다. 여행하는 동안 말이 안 통해서 너무 답답하셨었다며 여기서 한국인 처음 봤다고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웃음) 컨시어지카운터에서의 업무는 간단한 짐 보관과 비품 대여도 있지만 교통편을 알려 드리거나 주변 맛집, 투어프로그램 등을 추천 드리는 일도 있는데, 이런 건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받기가 어려운 서비스다.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아는 스텝은 몇 명 있었지만, 한국어와 중국어를 하는 스텝은 부족했다. 그래서 나를 홋카이도에 파견한건가..? 사실 한국의 경우 외국어 장인들이 어느 회사에나 많기 때문에 왠만한 실력 가지고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데, 일본에는 비교적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우리 호텔에서 영어를 잘 하는 직원들도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어 말은 좀 한다지만 한국에서 영어 잘 한다고 하는 직원들에 비해서는 문법도 스펠링도 미숙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에 재능이 있는 한국인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일 수 있다. 나 정도 실력으로도 외국인 손님 담당이 되버렸으니까.
당연히 한국 손님들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고, 중국과 대만 손님도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중에 대만유학을 다녀온 일본인 직원이 본사에서 한 명 파견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중국어가 가능한 스텝이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중국과 대만 손님들에게 짠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중국 손님들은 실제로도 좀 질서가 없는 편이긴 했지만 의사소통이 되면 충분히 컨트롤이 될텐데,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스텝들에게 홀대 아닌 홀대를 받는 부분이 있었다. 분리수거 개념이 없어서 페트병과 과일껍질, 휴지 등을 한 비닐에 넣어 단체로 투척하고 간다는 점에서는 좀 귀찮은 손님들이긴 했다.(스텝들이 따로 분리해서 버려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단체손님들이 엘레베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아서 다른 개인 손님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부분은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본어나 영어로 아무리 줄을 서라고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문제였기 때문에, 내가 중국어로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를 찾아왔다.
欢迎光临(환-인꽝린) ; 환영합니다.
请排队(칭-파이뚜이!) ; 줄을 서세요.
稍等一下(칭-덩이샤) ;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请进(칭-찐-) ; 타세요.
"환영합니다"로 인사한 후, 엘레베이터까지 "줄을 서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타세요." 이 세 가지 말만 쓰면 중국인손님들은 모두 내 말에 잘 따라주었다. 간단한 말들을 정리해서 동료스텝들에게 공유했고 나중엔 모든 스텝이 이런 중국말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뿌듯)
자연스럽게 중국인 가이드들과 손님들과 친해지다보니, 한국에서 스파르타로 4급 자격증까지만 따고 그만뒀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바로 쓸 수 있는 말 위주로 회화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일본 서점에서 찾은 교재인데, 일본어로 한 마디 중국어로 한 마디 교차로 나오는 CD가 있어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MP3에 음성파일을 옮겨서 통근길에 듣고 다녔다.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어서 인삿말과 함께 날씨에 대한 말과 칭찬하는 말을 외웠다.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어요. "로 시작하여 "오늘 추우니까 옷을 따뜻하게 입으세요. ", "감기 조심하세요. ",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옷이 정말 예뻐요.", "짐이 정말 무겁네요.", "고생하셨어요." 등등 한 마디 건낼 때마다 좋아해주시는 손님들 모습이 정말 좋았다. 가끔 나에게 중국인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워-스 한구어런!이라고 대답하면 중국어 잘한다며 칭찬해주었다. 씨에씨에!나중에는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손님들도 생겼다.(웃음)
이런 중국어 인사 몇 마디 덕분에 대만항공 승무원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중국어를 하는 한국인 직원이 있다고 승무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는지, 내가 중국어로 인사하면 "네가 그 한국인 직원이구나."라고 말하는 일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대만항공 회식에 초대받기도 했다. 내가 밀크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올 때마다 대만공항에서 밀크티를 사다주는 승무원도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두부디저트나 술안주, 화장품 등을 선물로 주는 승무원들도 있었다. 대만승무원들과의 추억이 많아서 나중에 이것도 써보면 좋을 것 같다.
아예 중국말밖에 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가 도움을 요청하신 일이 있었는데, 서툰 중국어였지만 한자가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해 종이에 써달라고 해서 알아듣고 도와드렸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 카운터 앞을 지나갈 때마다 고맙다고 하시며 사탕과 금색 인형 등을 하나씩 주고 가시는데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던지.
벨서비스로 일하는동안 하루종일 서있다보니 발은 아프고 물집은 잡힐지언정 근무하는동안 손님들과 나누는 따뜻한 감정들이 나에게 보람과 힐링이 되었다. 특히 체크아웃 후 투어버스를 보낼 때 버스가 갈 때까지 인사를 해야 했는데, 정중하게 고개숙여 인사도 했지만 두 팔을 들어 하트를 보내면 하트를 돌려주는 손님들에게 힘을 많이 받았다.(헤헤)
중국어는 서툴어도 나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중국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환영 받았다고 하지만, 일본손님들을 상대할 때는 실수를 피할 수 없었다. 가끔 못 알아듣는 일도 있었고(예를 들면 탈의실을 "키가에시츠(着替え室)"라고 하기도 하지만 "코-이시츠(更衣室)"라고도 말한다는 걸 몰랐다.) 내가 잘 모르는 걸 문의 받아서 당황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ボヨン(보용)"이라고 써있는 명찰을 보여주며 "스미마셍. 외국인이라서 잘 모르겠어요."를 시전하면 굳어 있던 표정이 온화해지면서 이해모드로 바뀌는 손님들이 많았다. 약아보여도 어쩔 수 없다. 정말 외국인이라서 그런 걸 뭐. 그리고 가끔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너무 좋아해주시는 손님들도 많았다.(?) 객실까지 짐을 들어 드리고 안내해주는 것도 벨서비스의 업무 중 하나였는데, 일본인 손님들은 내가 서비스하는 중에 한국드라마를 너무 좋아한다거나 한국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시며 몇 달 전에도 한국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대화를 거는 분들이 많았다. 혐한이라고 하지만 최소한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에 호의적이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놀러오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일본 가족과는 특별한 인연이 되기도 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사실 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꼼꼼하지 못한 엔프피라서 실수가 잦아 상사에게 많이 혼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고다, 부킹닷컴 등 많은 사이트에서 외국인손님들이 한국인스텝을 언급하며 친절하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칭찬의 후기를 남겨주시기도 했고, 일본인 손님들 중 컨시어지카운터에서 짐을 보관해드리며 잠깐 얘기를 나눴던 손님이 일본의 숙박예약사이트에 이런 외국인스텝은 일본에 온 "보물"이라며 칭찬해주셔서 아주 잠깐 나의 위상(?)이 높아지는 일도 있었다. "보물"이라고 얘기해주셨지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고 그저 일본어로 호텔주변에 있는 맛집을 추천해드렸던 정도였다. 이런 소중한 후기들로 상반기와 하반기에 있는 업무 평가 때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을 많이 커버칠 수 있었다.(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