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당시 겨울 옷을 적게 들고 왔기 때문에, 한 번 겨울 옷을 여러 벌 사기로 했었다. 개강 첫 주는 수업도 별로 없고 있어도 짧게 끝나서 남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지난 년도 같은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왔던 동아리 누나가 한 번 꼭 가보라고 추천해 준 아울렛에 가기로 했다. 바로 독일에서 가장 큰 아울렛이 있다는, 아니 도시 그 자체가 아울렛이라는 메칭엔으로. 이 도시는 뮌헨과 정반대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전날 뮌헨 학생회 개강파티로 인해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9시에 집에서 나왔다. SM과 같이 3시간 넘게 기차를 탄 끝에 13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10분 정도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가니 으리으리한 옷 매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말 옷 매장들밖에 없었다. 아울렛 도시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울렛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에 관심 있는 매장이 보이면 다 들어가 보았다. 평소 스포츠 선글라스를 사고 싶었기 때문에 Oakley와 독일의 대표 의류 회사인 Adidas가 보여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두 곳 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특히 Adidas는 건물이 매우 커서 마음에 드는 옷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공간이 좁아 혼잡스러웠고 전시되어 있는 옷도 적어 실망스러웠다. 이후 Lacoste와 Levi's, Esprit, S.Oliver에 들어가 보았지만, 가격이 예상보다 비싸고 옷들도 다 별로여서 소득 없이 나왔다. 그러다 우연히 Haribo 매장을 발견했다. 뮌헨 시내도 제대로 안 돌아봤었기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본 Haribo 매장이었다. 들어가서 보니 진열되어 있는 젤리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젤리의 종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내가 독일에 오기 몇 달 전부터 Haribo 젤리를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동생이 기억나, 잠시 밖으로 나와 영상통화를 걸었다. 젤리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먹고 싶은 것이 보이면 말해달라고 했다. 평소 나를 볼 때는 멍하던 동생의 표정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나하나 담다 보니 장바구니에는 10봉지나 담겨 있었다. 그렇게 아울렛에서 처음 산 것은 옷이 아닌 젤리가 되었다.
독일 최대의 아울렛에 있는 아디다스 치고는 작다고 느껴졌다 | 아울렛임에도 다른 어느 옷 매장들보다 문전성시였다
이후 Tommy Hilfiger, Ralph Lauren 등 비싼 브랜드 매장에 가서 옷 구경만 하다가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이후 우리가 가장 기대하던 Hugo Boss 매장에 갔다. 건물 외관도 검은색으로 멋있게 되어 있었고, 크기도 장난 아니었다. 원래 10개 이상의 브랜드가 같이 있어야 할 건물 하나를 통째로 이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면적이 Adidas 매장의 10배는 되어 보였다. 내부 또한 마음에 들었다. 통로도 넓고 옷들도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그리고 치명적인 문제점은 역시나 가격이었다. 아울렛이라고 해서 나 같은 학생이 살만한 가격을 제시해주진 않았다. 옷을 살 의지는 바로 꺾여버렸고, 아버지 선물로 넥타이만 하나 사가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넥타이마저 비쌌다—비싼 건 50유로까지 했다. 동생에게 물어봐서 가장 어울리고 덜 아저씨 같은 남색 넥타이를 골랐다.
이후 SM과는 흩어져 각자 원하는 곳에 가기로 했다. Olymp라는 브랜드에 가서 깔끔한 하늘색 와이셔츠 한 벌을 산 뒤, 패딩을 사기 위해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짧으면서도 두꺼운 패딩은 찾을 수 없었다. 10월인데도 아직 겨울옷을 다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노스페이스에는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촌스러운 디자인을 한 패딩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아울렛 바로 밖에 Jack Wolfskin이 있다길래 이곳에 갔다. 이곳도 역시 두꺼운 패딩은 없었다. 대신 마음에 드는 바람막이가 있었다. 게다가 바람막이 안에 경량 패딩까지 딸려 있고, 분해와 결합이 가능한 제품이었다. 이월 상품이라 160유로밖에 안 해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하고 고심 끝에 구매했다. 이렇게 내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소비를 한 후 SM과 다시 기차역에서 만나 한겨울 옷은 하나도 못 산 채 집으로 돌아갔다.다른 것들은 잘 사면서, 옷 사는 데에 있어서는 영 꽝이다. 나 혼자 보면 마음에 드는 옷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이다. 결정장애도 한몫한다. 여자의 눈 없이 옷을 사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