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64. 꽃부리의 이야기 < 2023년 8월 26일 >

by 임선영


새벽에 눈이 뜨인 나는 가을을 재촉하는 더운 바람을 쫓아버린 비 소리에 마음을 뺏기며

새벽 서정에 긴 숨을 들여 마신다.

문득 새벽바람에 시골집 쪽 마루에 앉아 오던 비를 바라보며 턱을 고이고 아버지를 그리던

자신이 생각 나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아오른다.

지금은 영원히 다른 세상으로 가신 애절한 정을 나누어 주시던 부모님들....

결국 다 곁을 떠나고 자신마저 가야 하는 길 위에 서서 세월이 지나가며 내리는 비는 한 생

삶의 진한 눈물인지도 모른다.

그놈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정이 이리 넘쳐서야 되겠는가 하다가도 꼭 간직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정 요사이는 너무도 귀해진 정 그것 때문에 이 나이에 이리 눈물이 나다니.....


전남 강진땅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이 쓴 '사부곡(思婦曲)'이 생각난다.

'하피'는 옛날 예복의 하나입니다. 붉은 노을빛 치마를 말합니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경기도 양평에 남았던 아내 홍 씨는 남편 귀양 10년째 되는 해,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그리운 마음을 담아 남편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 치마에 다산이 두 아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을 쓰고 이를 책자로 만든 것이 '하피첩'입니다.

다산은 치마 한 조각을 남겨 매화와 새를 그린 족자를 만들어 시집가는

딸에게도 주었다고 하죠.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평생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어머니 치마에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쓴 글씨, 세상에서 이보다 값진 보물이 있을까요?

다산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담고 세상을 떠돌던 하피첩은
다산의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노을빛 치마에 얽힌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2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들 가슴을 잔잔하게 적시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피첩처럼 늘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편지로 서로의 정을 이야기했다.

난 어린 시절 사랑방에 들어가 아버지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몰래몰래 읽었던

아버지의 엄마에 대한 사랑 늘 이렇게 쓰다 만 편지도 있었다.

"서방님 전 상서" "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늘 건강을 축원하옵니다"

늘 떨어져 살던 남편에 대한 극진한 대우와 원망이 아닌 늘 순종으로 자식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봉양하시던 그 어머님의 끈을 붙들고 살던 우리들....

자식에 애잔함의 여운이 오늘날 시서화로 인생을 노래하며 노후를 보내게

되는 자신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늘 그리웠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결혼 후 친정에 안 오는 딸에게 쓴 아버지의 그 해 봄 목련꽃에 그려진

아버지 夏山의 그림 편지에 쓴 "草綠湖南萬里情"이라는 보고품의 화제는

그리움이 물밀듯이 쏟아져 눈물을 박아지로

흘리며 아버지를 찾았던 그 기억이 가슴을 친다.


67d6f6c75ecfa197d3e78e49cf9c6a818f7e501e


정(情)이란 무엇일까?

'한국인의 마음, 그 몹쓸 사랑'이라고 수식했지만, 정말 그 정이란 무엇일까요?

주변을 둘러보면 같은, 또는 비슷한 말로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정입니다. 인정

모정, 다정, 미운 정 고운 정, 더러운 정, 얄미운 정.

난 지금에 와 생각하니 어린 시절을 참 보물을 찾아 하고 살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 많은 정 속에서 仁泉의 정은 시인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리웠던 아버지 정 , 엄마의 따스했던 정, 할머니의 다스리던 정, 부모 안 계시던

사촌 언니들을 잘도 잘도 보살피던 어미를 보며 같이하며 나누 던 정,

방학 때면 서울대 배지들을 단 임 씨들이 모여 살던 익산 동고도리 우리 동네 오빠들이

사촌 언니들이 잔뜩 있는 우리 집으로 몰려들면 방학 한 달 동안 우리 집에서는

늘 잔치가 벌어졌다.

웃음꽃 잔치, 지름병 귀신 놀이 잔치, 노래잔치, 치칸 귀신 쫓아온다 놀리던

그때는 멋 모르고 무섭고 즐거웠는데

지금에 와 생각하니 난 그 여러 정에

길들여져서 아름다운 유년기를 보내며 멋진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던 멋진 아이였다.

정말 감사 감사한 어린 시절이었구나, 복 많은 아이였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요 시대 요 사히 갈수록 정이 메말라간다고 한탄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도덕이 무너지는 모습과 소리를 들으며 " 왜 세상이 이리 무섭게 변해가"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말하는 정은 인정(人情) 우리는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정'을 달고 살지요. 그놈의 정 때문이라느니

인지상정이라느니, 정나미가 떨어진다느니, 인정머리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합니다. 그렇게 공기처럼 물처럼 익숙하다 보니 도대체 그놈의 정이 뭔지에 대해선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정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다.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없다. 분명히 없는데

있는 것이 정이다. 존재하되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그 없는 것에 손을 데고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가 녹고

그 없는 것에 살이 여윈다"라고 한다.

정에 살고 정에 울며 정을 노래해 온 우리들은 그렇게 커 왔습니다.

그리고 정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정이 어떻게 '용서'라는 이름으로 승화되는지를 생생한 정이 주는

감동을 전하며 일생을 살고 그것으로 한 가정을 그토록 지겹도록 뜨거운 역경을 이겨내며 사랑하고 다독거리고 정으로 안아주며 안정된 그늘로 만들어 가며 가정을 잘 지켜왔죠. 그 답이라도 하듯

가끔 내 외조자는 나에게 난 당신의 그 착한 심성에 최대한의 갚음을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우리 집 보살님을 보살핀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그 정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본다.

왜 갈수록 '비정'한 한국사회의 그늘이 깊어가는지도 되짚어 보았습니다.

부부간의 정, 형제간의 정, 남녀 간의 정, 친구 간의 정, 사물을 사랑하는 물정(物情)으로 나누어

살펴보니 우애의 정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하고, 영혼의 우애를 나눈 고흐 형제 이야기는 애절합니다.

친구 간의 정에서는 '아름다운 벗' 퇴계와 고봉의 '망년지우(忘年之友)'가 시대를 초월해 오늘에

더욱 빛납니다. 정은 인정만이 아니라서 다룬 물정(物情)에서는 정이 인정을 넘어 어디까지 확장되고

숭고하게 승화되는지를 동방이나 서방이나 역사를 뒤져 생생하게 조명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왜! 왜!

요즈음의 입시 위주의 교육의 부재가 道味德風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시기가 된듯하다.

못 가서 안달이던 SKY 대학을 쉬고 의대 공부를 하는 아이들로 인재들이 몰리는 수입이 좋은 분야로

물질 위주로 변해가는 시대의 아이들 道味德風의 바람은 불지 못하고 돈바람의 바람만 맞으려 하는

아이들이 꽉 차 있는 시대, 그나마 인구는 늘어나지 않는 공간에서 돈에 혈안이 되어있는 시대에서

돈에 미쳐 그곳의 허상을 놓치면 우울증 공포증으로 꽉 찬 사회가 될 것 같은 무서움이 갑자기 빗소리에서

느끼는 서정을 싹 가시게 하는 작금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소한 곳에 있는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