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by 그냥

언제인지도 흐릿한 어느 날 엄마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데 그러시더라.

"너 어릴 때, 엄마가 훈육이랍시고 혼도 많이 내고 매도 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훈육이 아니라 내 화를 너한테 풀고 있더라. 그래서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어. 미안했다."

의아했다. 그날의 대화주제가 생각나지 않지만 평소에 엄마한테 불만이 있지도 않았고, 별로 혼난 기억도 없다. 사과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딸에게 사과라니? 그 사과를 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멋지다.'였다. 세상에는 해야 할 사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엄마는 먼저 사과할 줄 어른이구나. 우리 엄마 정말 멋지다. 내가 너무 K-장녀스러운 생각으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자식 간은 부모는 자식을 굽어살피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미묘한 수직적 관계로 특히나 미안하다는 말은 좀처럼 뱉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엄마는 수없이 많은 내 생각을 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표현들에 인색한 채로 살아가는 것 같다. 말 안 해도 알겠지. 이해해 주겠지. 특히나 미안하다는 말은 뱉으면 내가 굽히고,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세운 가시는 나를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외롭게 한다.


비단 미안하다는 말뿐만이 아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 고된 업무 끝에 '수고했네.' 이 한마디면 그간의 힘듦은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 날아간다. 힘든 하루 끝에 듣는 한마디가 뾰족한 화살이 아니라 '힘들었지? 고생했어.'라면, 사람은 그것으로 또 내일을 산다.


가까울수록 표현은 더 중요한 것 같아. 가까이에서 날아온 공은 더 아프고, 안아주는 품은 더 따뜻하다.


알면서도 나 또한 한 단어면 될 그 표현에 몹시도 인색하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꼭 했어야 할 말들이 명치끝에 소화되지 못한 채 꾹꾹 눌러져 쌓여있다.


말의 힘은 크다. 그날 엄마가 나에게 전해준 사과는 사과로만 끝나지 않고, 엄마의 귀한 아이를 자라게 했다.

오늘은 꼭 전해야지.


엄마 감사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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