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 11- 유부남의 시작은 장발인 건가
프러포즈보다 머리커트에 감동받았던 날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결혼하면 여자들은 그동안 길렀던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자는 장발을 해본다고.
한참 오빠는 결혼 전부터 예수님 머리처럼 머리카락을 길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안 돼. 그건 예수님만 잘 어울리는 머리야."
"왜, 남자들 중에 머리 기르고 싶은 로망이 있어."
"난 싫어 머리 기른 건 진짜 싫어"
한 번은 내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던 건지.
"알겠어. 길러봐."라고 무심코 내뱉었다.
진짜 그때부터 작정한 듯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더니 그새 머리카락이 귀 뒤를 덮는 기장까지 왔다. 그땐 오빠와 결혼준비로 상견례를 하게 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잘라. 우리 엄마 머리 기른 거 보면 난리 난다고! 오빠 어머님도 안 좋아하실걸?"
"아, 아까운데.."
"오빠!"
다행히 깔끔한 머리로 상견례는 무사히 끝이 났다. 이후로 다시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더니 그새 귀 밑으로 또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그때는 곧 스튜디오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잘라야 하지 않을까? 평생에 한 번 남는데. 너무 지저분하잖아."
다시 찾아온 고비에 오빠는 나에게 약속을 제시했다.
"결혼하면 기르게 해 줘. 딱 한 번만. 우리 아빠도 젊었을 때 한 번 기른 적 있어서 나도 하고싶어"
이후로 스튜디오 촬영이 다가오자 오빠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결혼하면 나 진짜 기를 거야. 그땐 말리면 안 돼."
"그래 길러라 길러!"
왜 그랬을까. 그때 왜 허락했던 걸까! 오빠는 결혼과 동시에 미용실을 가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내 허락을 기다렸던 걸까.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더니 그새 단발인 내 머리카락을 가뿐히 넘기는 기장이다.
"오빠 회사에서 뭐라 안 해?"
"친한 형이 여기 무슨 오랑캐가 왔냐고 그러던데." 하며 끅끅 웃는 오빠. 뭐가 그리 웃기는지.
나는 말리진 않았다. 분명 어중간한 머리길이가 오거나 곧 다가올 여름엔 더위를 못 참는 사람이니까 확 자를 거라고. 여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어중간한 길이에 이르자 오빠도 주체 안 되는 머리에 싫증이 나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자르겠구나!'
희망이 보였다.
"나 이번에 머리 다듬고 파마하려고."
"뭐시라?"
기어코 첫 파마를 하고 왔다. 한참 찾아보더니 매직으로 피고 S컬로 하고 싶다던 오빠. 12만 원을 줬다는 머리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당시 예식장을 다니면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는데 남편을 보더니 물었다.
"예술하시는 분이셔?"
몇 달간 잘 유지됐던 파마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우린 6월이 돼서 스페인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때 스냅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난 분명 그때는 자를 거라고 생각했다.
"다듬고 파마하려고."
"뭐?! 오빠 우리 유럽에서 스냅 찍기로 했잖아. 이젠 자르자. 원 없이 길렀으니까."
"왜애 나 파마한 채로 가고 싶은데? 유럽에서 딱 유럽사람처럼 멋있게!"
"아냐. 안 멋있어. 거기서 바람에 휘날리고 지저분 해지면 어쩌려고?"
"괜찮아. 안 그럴 거야. 나 머리 손질 잘해."
또 한 참을 알아보더니 이번엔 S컬로 하고 왔다. 유럽여행에서는 투어를 할 때마다 마주했던 가이드분들이 남편분 머리카락이 참 멋있다며. 예술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다. 그냥 예술한다고 할 걸 그랬나. 스냅 촬영 당일엔 다리에서 바람이 불자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남편분 머리카락이 아내분 얼굴을 가리세요!"
"머리카락 좀요!"
"머리카락을 귀로 꽂아볼까요?"
언제쯤 자를까. 이 남자는 자르긴 할까? 싶었는데 최근에 자르고 왔다. 그것도 나에게 깜짝 프러포즈로!
요 근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1박 2일 호텔에서 놀다 온 적이 있었다. 역까지 데리러 오겠다길래 평소에도 그랬기에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 오빠를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머리카락이 깔끔해진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것이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도 잘 안 나온다던데 정말이었다.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가장 놀랐던 날.
오빠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놀란 내 표정이 원했던 반응이었던 건지.
"다른 남자가 앉아 있는 거 같아."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달라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층수에 멈춰서 현관문을 열렸는데 오빠가 잽싸게 앞으로 걸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또 준비한 게 있는데 눈 좀 감아봐."
"뭔데? 오늘 뭔 날이야?"
가끔 유튜브에서 보면 남편이 눈을 감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안내해서 산 떠 머니처럼 쌓인 설거지를 보여주던데. 그 찰나에 오빠가 문을 여니, 집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사랑 가득한 음악소리가.
"뭐야, 눈 떠도 돼?"
"아직, 아직 안돼 잠깐만."
3초 뒤 현관불마저 정전이 됐을 때 오빠는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짜란!"
복도부터 시작된 촛불길의 향연.
"뭐.. 뭐야?"
여전히 말끔해진 오빠 얼굴에 충격이 가시기도 전이라 뭔가에 홀린 듯 거실까지 걸어갔다. 거실에 는 하트 모양으로 촛불을 만들어 두었다. 뒤돌아보니 오빠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00야.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주머니 속에서 반지를 꺼내길래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프러포즈! 나 무릎 안 꿇고 프러포즈했다고 그래서 다시 해줬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2020년 11월 14일 만난 지 2주년이 되던 날 오빠가 프로포즈를 했다.
노래가 들리던 티브이가 벽으로 돌려 있어서 영상 편지라도 준비했나 내심 기대했는데
"밝아서 돌려놨어."
"영상편지 준비한 줄? 근데 나 오늘 이것보다 오빠 머리 커트가 더 놀랐어."
그 말에 한바탕 웃은 기억이 난다. 한 번 자르고 나니, 다시 말끔하게 머리를 다듬을 예정인가 보다.
시부모님께서는 영상통화에서 오빠를 보고는 너무 깔끔하다며 좋아하셨다.
"00야. 자르니까 훨씬 낫지"
"전 너무 좋아요!"
드디어 장발에서 벗어나는구나! 이어서 주말에 친정을 갔더니 주차장에서 오빠를 보고 알아보지 못했다가 놀란 듯 다시 쳐다봤다.
"어? 머리 잘랐네?"
우리 엄마는 손뼉을 치며 해맑게 소리쳤다.
"아이고, 우리 사위! 돌아왔네.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