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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 순간 Aug 11. 2024

신혼일기 12- 우리의 이번 여름휴가는 화장실

휴가를 앞두고 결정한 대장 내시경  

내일은 우리 부부의 대장 내시경 예약 날이다. 예약시간은 10시. 저녁 7시부터 우린 서로 마주 본 채로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30분 동안 14정을 나눠먹어야 했다. 물약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알약으로 가져왔는데 막상 보니 먹기가 싫어졌다. 근무하는 병원에서는 차마 원장한테 항문을 보여줄 수 없으니 가까운 병원으로 예약해 뒀다. 오빠는 떨린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별거 아니라며 센 척을 했다. 나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치얼스"

알약 두 개를 집어 맞대고 '짠'  하고 먹었다. 30분 안으로 14정만 먹으면 되는데 오빠는 분으로 따지며 몇 분 몇 초 뒤에 먹어야 한다며 알람까지 맞춰뒀다.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돼!"

겨우 14정을 다 먹고 둘은 물배 찼다며 볼록해진 배를 서로 보여줬다. 하지만 이제부터 1리터의 물을 마셔야 했다. 이미 배까지 부른 와중에 물까지 더 마셔야 한다니. 이온음료를 사두길 잘했다.

 

오빠가 물마시기 전에 잠깐 와보라 해서 갔더니 살포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희 대장 건강하게 해 주세요."

요구인지 혼잣말인지 어렵겠지만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오빠의 기도였다. 소리 내서 기도하자고 하면 어색해하는데 그럴 때마다 쓰는 방법이다. 한 번도 해보질 않아서 인지 본인도 자신의 대장 상태가 걱정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은 젊은 나이임에도 궤양이 있거나 용종을 많이 떼는 경우가 많다. 대장 내시경예약을 미리 해둔 나로서 그냥 하지 말까 하고 수십 번 고민하며 여행을 갈까 했지만 요즘 들어 내시경 사례를 보아하니 꼭 해야 할 검사라고 다짐했다. 휴가철에 왠지 대장내시경을 하자니 뭔가 아까운 이 느낌. 남들 놀 때 우린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한다니. 6월에 이미 2주 동안 유럽을 다녀왔고 10월에는 친정 엄마의 환갑으로 제주도를 가기로 계획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왠지 아까워서 내시경을 취소하고 고민하던 중, 유튜브에서 짧은 쇼츠로 유재석과 지석진이 나오는 핑계고라는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전도연 배우가 나와서 한 말이 인상 깊었다.


"내가 꼭 어디를 가지 않아도 내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휴가이고 휴식인 거 같아요."  


휴가는 '어딘가냐'가 아닌 '나의 마음가짐'이다.

그 영상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편하게 느껴지는 곳이 휴식이자 휴가이다. 누군가 갔기에 나도 가야 된다는 강박에 숙소를 예약하고 떠났다는 뜻에서 일까? 여행을 다녀오면 그 여파로 며칠 동안 몸이 피곤한 걸 경험해 본 사람이 있다면 공감하기 더 쉬울 테니까. 물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떠나는 게 휴가겠지만.


"사람 진짜 많았어요. 휴게소에서도 바글바글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다 몸살 난 거죠. 뭐. 너무 더워서 혼났다니까요?"

"가족끼리 여행 왔는데 애들은 감기 걸리고 전 몸살 났어요. 애들은 지금 카페에 맡겨두고 수액 맞으러 왔어요."

2주 전부터 병원에는 휴가철 시즌임에도 몸살이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가까운데라도 다녀와야 아쉽지 않을까?라고 갔다가 후덥찌근한 더위와 냉방병에 걸리는 등등 휴가철에 아픈 만큼 가장 억울한 경우도 없다.


결국 첫째 날 대장 내시경을 하고 휴가철 그동안 미뤘던 집안 대청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오빠 회사의 직속 팀장님이 100kg이나 나가는 물건을 발등 위로 떨어트린 사고가 났다. 물건은 100kg지만 작게 압축된 상태라 충격이 더 컸을 거라고 했다. 발등에 떨어졌을 때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셨다고 하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2주 동안 입원해야 된데. 지금 이미 휴가 간 사람도 한 명 있어서 나까지 가게 되면 다들 힘들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뭐. 일해야겠네."

회사에서 이 사람의 성실함을 알아주길!

"그래도 하루는 뺐어. 내시경은 해야지."


3일 전, 우린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 위해 치킨을 먹었다. 외식비를 아끼자며 집에서 해 먹다가 오랜만에 먹은 치킨이 어찌나 맛있던지. 하루 전날에는 미음이나 카스텔라 혹은 케이크를 먹어야 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케이크와 카스텔라를 잔뜩 사가져 와선 입 안에 욱여넣었다. 먹다 보니 둘 다 속이 느글거렸다. 둘 다 한식을 좋아해서 더 괴로웠다. 평상시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던 오빠도 오늘따라 먹고 싶다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매콤한 음식이 그렇게 당길 수가 없다. 옆에선 오빠가 뒤늦게 신호가 왔는지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서로 누군가에게 쫓기 듯 신호가 오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평온한 얼굴로 나오는 오빠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번 우리 여름휴가는 화장실이다! 건강 지키기 프로젝트!"


이제는 서로를 위해 건강을 챙기는 사람이 되자. 마흔이 됐을 때, 쉰이 됐을 때. 앞으로도 쭉 계속 함께 할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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