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사진 證明寫眞

by 엉클디

길이 3센티, 너비 2.5센티 즘 되는 종이 조각에 나의 심상이 봉인된다.

매번 세상에서 가장 신뢰받는 모습을 상상하며 표정을 설계하지만,

가장 부자연스런 표정이 담긴다. 그 이유는

가장 형식적인 관계인에게 보내는 애절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리라.

증명사진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몸의 포즈도 필요없이 오로지 얼굴의 포커스를 맞추고

약간의 삐뚤어짐도 용납치 않는 석고상의 표정을 요청한다.

사진사는 최고의 표정을 만들기 위해 현미경 배율을 조절하듯

나에게 아주 미세한 브레이크 댄스를 지시한다.

우선적으로 머리의 상하좌우의 각도를 렌즈와 정확히 일치시키는 작업,

표정을 만들기 위해 얼굴의 근육을 다양하게 배치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승인된 것은 단단하게 고정시키면서

마지막엔 호흡도 멈춰져 버린다.

질식된 몇 초의 시간은 사진사의 일사분란한 명령에 의해 감당된다.

그 순간이 인화된 얼굴은 즉시 가공 과정을 거치게 된다.

“좀 더 밝게”, “좀 더 입체감 있게”,,, 증명사진이란

보통의 기준을 판별하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형식에 불과함이다.

지금껏 보관한 못다 쓴 증명사진들을 꺼내 죽- 펼쳐 보았다.

내가 이렇게 변해가는 것인지, 사진관이 다 달라서인지 서로 참 다르다.

그 어느 것도 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말 나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먼저 거울을 본다. 그리고 눈을 응시한다. 타자인 것 마냥,,,

나를 투사하는 매체로서 얼굴은 꾀 익숙하지만, 증명사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나’라는 기표記標를 모조리 스캔하여 분석해도 실마리는 잡히지 않는다.

꼴form은 얼aura을 담아내는 그릇과도 같다. 그래서 얼-굴은 자기증명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증명 뒤에 숨은 의도로 인해 얼굴은 복제 생산되고 있다.

복제생산과정은 얼굴의 아우라를 탈락시키고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로 접속되는 것이다.

백 여년 전, 핸드메이드가 지금은 공예工藝의 지위에서 존속하고 있음을 본다면

아우라를 탈환할 명분은 ‘희귀稀貴’로의 전향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한다. 한번 흘러간 강물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얼’과 ‘꼴’의 합당한 관계 모색이 요구된다.

정제된 기표 가치의 조합이 아닌, 느슨하지만 미세한 관계망이 이질적인 차이로 접속하여 유의미한 가치로서 유통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물은 아우라를 내품고 있다. 왜일까?


타인에게 자신의 메시지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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