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가 전해주는 예술의 평등성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어떤 얼굴은 인식되지 않는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랑시에르와 함께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무엇이 들리고 무엇이 침묵 속에 묻히는가.
오래된 속담이 있다. “세상을 보려면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세상이 사라지는데, 어떻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귀로 듣던 소리들, 피부로 느끼던 질감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던 흔적들.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은 이런 경험과 닮아있다.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귀가 무엇을 들을 수 있는지, 피부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예술이란 그 경계선을 흐리게 만들고, 때로는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미학적 체제는 감각의 정치학이다.” 랑시에르의 이 문장을 접하면 많은 이들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떨린다. 정치란 단지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가를 결정하는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마을의 어느 노인은 평생을 말없이 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일상의 소음에 묻혔고, 바쁜 발걸음 소리에 섞여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젊은 사진작가가 노인의 주름진 손을 찍었다. 그 사진이 전시장에 걸리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 노인의 삶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정치성이다. 그것은 결코 정치적 구호를 외치거나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침묵하는 존재, 가장 주변부에 있는 것들에게 갑자기 빛을 비추는 행위. 그래서 예술의 정치성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있다.
“가장 아름다운 강은 보이지 않는 강이다”라고 시인은 말했다. 마찬가지로, 가장 정치적인 예술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감각을 재배열함으로써,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갑자기 볼 수 있게 만든다.
도시의 버스 안에서 한 노인의 구부정한 등을 본다. 수십 년간 같은 자세로 일한 흔적이 그의 척추를 영원히 굽혀놓은 듯하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석양의 빛이 잠시 그의 등을 비출 때, 그 구부러진 선이 마치 산맥의 능선처럼 장엄하게 느껴진다.
일상 예술이란 바로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특별한 주제나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미세한 시선의 전환. 랑시에르는 이를 ‘감각의 전복’이라 불렀다.
쓰레기통 옆에 피어난 민들레, 공사장 철조망에 걸린 비닐봉지, 버려진 건물의 금간 벽… 이런 것들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 대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한 비평은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 독자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어주는 행위,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찾아 잡듯이.
랑시에르에 따르면, 비평은 또 하나의 예술이다. 그것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작품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 또 다른 창조적 행위.
비평가들이 글을 쓸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이 글을 통해 누가 목소리를 얻게 될 것인가? 무엇이 새롭게 보이게 될 것인가?” 비평은 작품과 세계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이며, 그 다리를 건너는 동안 우리의 감각은 조금씩 변화한다.
비 오는 저녁, 시골 버스정류장. 낡은 옷을 입은 노동자와 비싼 코트를 입은 사업가가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하늘의 비를 맞고 있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감각이 평등하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의 평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것은 모든 감각이 똑같이 가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감각도 원칙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예술은 이런 평등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예술의 힘은 종종 가장 약한 신호로 다가온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속삭임처럼,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해야만 보이는 흔적처럼. 그러나 그 미세한 균열이 때로는 단단한 벽 전체를 무너뜨린다.
노인과 손자가 창밖을 바라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같은 달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이런 ‘함께 보기’의 경험이 아닐까.
랑시에르는 이를 ‘감각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우리가 무엇을 함께 보고, 무엇을 함께 듣고, 무엇을 함께 느끼는가가 결국 우리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결정한다.
비평의 최종 목적지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며, 누구와 함께 느껴야 하는가? 그 질문은 결국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 누군가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들 사이의 어둠, 그 검은 공간에 눈길이 머문다. 별이 아니라 별들 사이의 공간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는 우리에게 이런 시선을 요구한다. 이미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시선. 이미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직 들리지 않는 침묵을 향한 귀기울임.
예술은 우리에게 말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라.”
비평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들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침묵 속에서 태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며, 누구와 함께 느껴야 하는가?
아마도 그 답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과, 아직 목소리를 얻지 못한 이들 속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