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홀을 떠올리며, 도시에서 나를 되찾는 길
우리는 매일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오르내리고, 카페와 마트, 병원과 도서관을 드나든다. 거리에는 표지판이 있고, 벽에는 CCTV가 있고, 스마트폰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는 이 동선, 이 자리, 이 행동들은 정말 나의 ‘자유의지’일까?
여기, 에드워드 홀이 말한 “숨겨진 차원(The Hidden Dimension)”이 있다. 이 책은 마치, 무의식 속 공간의 매트릭스를 해독하는 지도와도 같다. 홀이 말한 ‘프로세믹스(Proxemics)’, 즉 인간 사이의 거리감이 단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그토록 늦게 알아차렸을까?
홀은 미국의 인류학자였다. 하지만 그가 다룬 ‘공간’은 단지 문화의 풍습이나 습관의 차이를 기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리듬’이자 ‘존재의 언어’였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거리를 통해 말한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지하철에서의 ‘숨막힘’, 불쑥 침범당한 카페 자리에서의 ‘불쾌함’, 반대로 고요한 공원 벤치에서 나누는 대화의 ‘따뜻함’. 모두 공간의 언어다. 다만, 그것은 너무도 조용하고, 익숙해서, 우리는 그 언어를 ‘침묵’으로 오해해 왔다.
하지만 이 ‘침묵’이야말로 오늘의 도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거대한 설교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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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밥을 먹고, 광고에서 말하는 ‘힐링’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는가? 이 모든 행동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디자인되었다. 계획되었다. 누군가, 혹은 어떤 구조가 만들어낸 행동의 알고리즘 속에 우리를 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한 “공간의 생산(The Production of Space)”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는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본의 명령에 따라 설계되고, 권력의 필요에 의해 배열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냈다고 믿는 도시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길은 걷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감시받기 위한 것이고, 유도되기 위한 것이다. 지하철 승강장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이동시키는 동선인 동시에, 혼잡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자, 군중을 통제하는 ‘도시의 도구’이다. 스마트폰의 위치 기반 기술(LBS)은 나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감시받게 만든다.
홀은 ‘숨겨진 차원’에서,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라는 거리보다 ‘어떻게 연결되고, 배치되는가’를 더 근본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도시의 모든 층위—물리적 공간, 디지털 인터페이스, 심리적 거리감—에서 더욱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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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통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군복 입은 경찰보다 더 무서운 건, 벽에 조용히 달린 CCTV 한 대일 수 있다. 제복보다 더 절묘한 권력은,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제 도시의 질서는 명령하지 않는다. 유혹한다. 요청하지 않는다.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합리성’이자 ‘편의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푸코(Foucault)가 말한 ‘훈육과 감시(discipline and surveillance)’가 작동한다. 권력은 외부에서 명령하지 않고, 내부에서 기대한다. 우리가 스스로 감시하고, 스스로 효율성을 따르며, 스스로 행동을 수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감시받는 타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시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일상적 실천(everyday practice)’이 빛을 발한다. 그는 우리가 소비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내는 ‘게릴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정해진 동선 안에서도 우리는 우회하고, 벗어나고, 새로운 의미를 덧입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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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시란 무엇인가? 그저 건물과 거리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삶의 감각이 모여 만든 거대한 무대인가?
홀의 숨겨진 차원은 말한다. 도시란 수많은 ‘의도된 배치(intentional arrangement)’의 산물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심히 길을 걷지만, 그 무심함이야말로 도시가 우리를 길들여온 방식이자, 우리가 길들여진 방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심한 걸음 사이로 ‘다른 가능성’이 삐져나올 수 있다.
우리는 공간을 새롭게 읽고, 다시 쓰고, 때론 거부할 수 있다. 걷는 방식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저항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길을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누비는’ 것. 마치 한 사람의 삶이 결코 예측불허하듯이, 도시 또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함께 구성해 나가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공공영역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감각이 깨어나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이 닿고, 몸이 스치고, 생각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있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편리함보다 관계가, 효율성보다 우연이 더 깊은 진실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점에서, 도시의 진짜 숨겨진 차원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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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구조를 바꾸는 것보다 먼저, 내가 서 있는 자리의 감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이 소유하려 하지 말고, 더 민감하게 감응하는 것. 더 빨리 이동하려 하지 말고, 더 깊이 머무는 것. 더 명확하게 설계하려 하지 말고, 더 열려 있는 가능성을 품는 것.
에드워드 홀의 책은 도시를 향한 책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을 향한 책이다. 숨겨진 차원은 공간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도 있다. 거리의 폭만큼, 나와 나 사이의 거리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감각을 깨우고, 침묵을 해독하고, 내가 걷는 길의 문법을 다시 쓰는 일. 그 일이야말로, 도시에서 내가 나를 되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