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는 '공간기억'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다. 유리잔으로 세계를 들여다보며, 세계는 당신을 들여다본다.
소리의 숲이 벽을 타고 올라와도 귀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컵과 컵이 부딪히는 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린다.
여기, 카페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왜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둘러싼 몸들 사이에서도 ‘비어 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것은 고독이 아니다. 타인의 지문이 남겨진 의자에 앉아 느끼는, ‘사적인 감정의 공공성’이다.
창가에 앉았다. 햇살은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린다. 맞은편 그 사람은 나를 보지 않는다.
보지 않아도 그의 페이지 넘기는 소리는 내 안에서 메아리친다. 라떼 위의 거품이 가라앉듯, 의자 다리 하나가 허공을 더듬는다. 나는 이 순간, 여기에 ‘나’를 내려놓았다. 이미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친한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
그렇다면 공간도 그럴 것이다. 공간은 단지 벽과 천장이 아니라, 감정이 머무르는 방식이다.
카페는 ‘머무는 곳’인 동시에 ‘흘러가는 존재의 물길’이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멀어져 간다.
그 거리는 잴 수 없다. 눈금 없는 자로 측정하는 ‘디자인되지 않은 감정’의 간극, 그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카페에 앉아, 타인의 존재를 통해 스스로의 결핍을 확인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손에 쥔 따뜻함은 순간이고, 그 뒤에 남는 것은 손바닥의 온기뿐.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했듯,
“집은 기억의 저장소이며, 상상력은 공간을 감정의 구조로 재배치한다.”
카페의 창가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집이 될 수도, 낯선 풍경이 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인테리어나 소음 때문이 아니라, 공간이 ‘어떻게 감정적으로 호출되는가’에 달려 있다.
바슐라르는 말한다.
“공간은 언제나 내면화되며, 그로 인해 한 장소는 고요함이 되거나, 외로움이 된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학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상상의 공간은 실재의 공간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현실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의 시간에서 흘러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혼자이고 싶어 카페에 가고, 동시에 외롭지 않기 위해 카페에 앉는다.
공간은 우리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감추고 싶은지 보여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물리적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요청에 도달한다.
공간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기억과 상상이 교차하는 ‘정서적 층위’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이제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 감정의 밀도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두가 가까이 있어도 멀리 느껴지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에 갇혀 있다.
혼자가 아니어도 외로울 수 있다면, 그 외로움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공간이 남긴 기억의 메아리일 뿐. 그러니, 오늘 카페에서 외로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감정의 방’을 지나온 것이다. 그 방에는 당신만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떠난 자리에 누군가 또 앉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