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여행이 시작된 지 상당히 오래된 듯 싶다. 그래 봤자 수 년이건만 처음의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혹스럽다. 대략 드는 느낌은 삶을 살아가는 생각과 실제가 언뜻 부자연 스럽다라고 할까? 말과 언어에 뿌리를 둔 나의 사고는 이른 아침, 몽롱한 상태에서 창문을 열 때 느껴지는 선선함과 새소리 속의 적막함에서 순간을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오는데 지각과 인식의 경계에 서서 그저 멍 하니 서 있는 것 같다.
‘있다’와 ‘있는 듯 하다’는 허구와 실재를 나타내는 말로 느껴진다.
어느 누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감각에 의해서 출현하는 모든 존재자의 느낌은 거대하게 서로 실재를 숨겨 두고 있는 것 같다.
있는 듯 하게… . 실존의 개념은 도대체 무엇인가? 있기는 한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은 모호스 부호처럼 살면서 잠깐씩 하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기에 머리에서만 맴돌 뿐이며 일상 속으로 잠수하게 되면 깨끗이 잊혀지고 만다. 이미 날 때부터 구전을 통한 형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즉, 물고기가 자기가 있는 세상이 물인지 모르는 것처럼 알을 깨지 못하고 그 무엇도 아닌 존재상태인 것임을 감지했다.
내 삶속에서 한가지 예를 들자면 제일 당혹스러운 것은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다.
나는 나의 탄생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잠드는 순간과 일어나는 순간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시작과 끝은 불입 문자로 보면 그저 환으로서 건네 받고, 움직이는 릴레이같은 움직임인 것 같다. 문명은 하루 아침에, 파괴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한 세대 만에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의 개념이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울고, 놀래고, 분노하고, 비열해 지는 것은 오랜 환의 작용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날뛴다. 나는 본래의 능력, 야만인, 배은망덕한 존재로서 세상을 염탐하고 기회를 포착하며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지금 내 눈 앞의 생존을 마주하는 실존이다. 실존을 이해하는 표현은 의미-가둠의 명사보단 의미-생동의 동명사가 낫다. 저 쪽 세상 인디언의 이름은 한 편의 시어로 들리듯 현상의 한 부분을 뚝 끊어 실존의 대명사로 부여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 양식의 표현을 비슷하게 다룬다. 개념은 양면을 구도로 횡적인 스펙트럼을 열거한다. ‘미추’. ‘장단’, ‘0 과 1’, ‘유무’,,, 이 양면에서 열거할 수 있는 문명의 지도가 셀 수 없는 뿌리를 내렸고, 그 스펙트럼 사이사이를 휘저으며 정말 있는듯 우리 생각 속에 이미지로 남는다. 나는 그 사이(차이)들에서 모호스의 부호처럼 장담 못할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유의)과 자연적인 것(무위)의 비교도 사실 양면 구도의 개념이기에 맞지 않지만 나는 자연스러움에 관심을 돌리게 되면서 나를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
"자연스러움이란 뭘까?"에 대한 물음의 답은 지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내 본성에 맡겨보고 관찰하면 될 것이다. 내 몸을 떠나 생각으로만 살았기에 생소하지만 길을 떠나는 기분으로 몸의 반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로 주말 아침과 늦은 밤 동네가 잦아 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찾아올 때 한 없이 한적한 상태에 내 몸의 감각에 주목한다. 그리고 걷는다. 이유는 없다. 걷게 되었다. 끊임없이 어제일, 내일의 상념들이 불쑥불쑥 의식의 스크린에 올라 왔다 가라앉는다.
한 동안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오름과 내림의 찰나가 꼭 ‘진실의 순간’처럼 뚝뚝 끊기듯 느껴졌다. 실존과 마주하는 느낌은 한없이 평범하기 짝이 없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여 나의 인식 안쪽 무의식 속에 화석처럼 박혀 전혀 그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는 상태이다. 그 당연한 바탕에서 일어나는 나의 세상에 대한 인식은 화면에 영사되는 영화처럼 그 것이 바탕 위에 투사되는 빛이라는 것을 보고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를 그토록 찾아 내려고 노력할수록 자연스러움과의 거리는 멀어지며 의미 속에서 찾는다 해도 그것은 개념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 격일 것이다. 내가 관찰하는 실존이란 일 없음, 의미 없음 그 자체의 마주하는 것이고 이는 걷고 있을 때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루소도, 니체도, 소로도, 벤야민도 걸으면서 사유했다. 걷고 있음은 생각을 생산·수렴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지만 걷기의 지극한 묘미는 상념이 잦아들면서 심심하고 담담한 그 무엇을 느끼는 것이다. 아마도 그 무엇이 ‘나’가 아닐까? 걷는 동안 나에겐 호흡도 없고. 순간도 없는 장소에 녹아 내린다.
산책 散策. 옛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만들게 되었을까?
잠시나마 꾀-미리 염두하여 머리를 쓰는 일을 흩어내려고 하는 행위일 것이라 본다.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할 때는 몸이 알아서 원하여 움직인다. 산책은 나를 자연스러움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