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첫 날.
모처럼 CG업체를 운영하는 후배와 그간 못 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멋진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다. 오후 2시. 우이동 계곡 초입에 도착하여 한참을 들어 갔다. 초가을이어서 그런건가? 도봉산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었다. 후배는 우스갯소리로 이러 날 배경소스를 수집하는 날이라고 했다. 이런 날은 도봉산에서 남쪽 청계산까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술 한잔 곁들인 긴 점심을 뒤로 하고 식당을 나오는데 햇볕이 그늘을 뚫어내어 담벼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 것인지 한참을 노려 보았다. 옆에서 후배도 담과 바닥의 경계가 안보일 정도로 햇볕이 강한 것 같다고 했다. 날이 청명해서 사물이 선명해 보이기도, 반대로 볕이 강해 사물의 형태를 뭉개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새삼스럽게 경험했다.
배도 부르고 기분 좋게 산길을 내려가는 도중, 한 무리의 산행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산행객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차량 한 대 정도 오를 수 있는 좁은 길이기에 순식간에 체증되어 버렸다. 사람이 쓰러져 있는 지금 이 공간은 일 순간에 작은 실험실로 느리게 변해 가고 있었다. 모든 눈은 한 곳을 집중하고 있었고, 주위의 모든 풍광은 일 순간에 진공관 속으로 흡수되며 옅은 흥분이 공간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은 행위는 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가 생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간의 수용체의 임무이기에 시각정보는 상황을 읽어내는 중요한 도구임에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인지 집단으로서 보는 행위는 제의적 의식을 연상케 한다. 과거 로마시대의 투사들의 목숨을 건 광경을 지켜보는 것부터 현대의 올림픽 스포츠에서 수 만의 관중이 모여서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전율을 집단무의식으로서 담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일상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카페의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로 자연스럽게 앉아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행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채집하며 위대한 실험의 자양분으로 간직하기도 한다. 또한 다수의 구경꾼들이 본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는 지위를 갖게 되며 이는 심판적 권력으로서 작동된다. 영국과 미국의 배심원단 제도는 이를 증명하듯 무시무시한 방향추를 흔들어 보인다.
역사는 구경꾼의 광기로 점철되었다. 유럽의 광장을 연상해보라, 또는 조선의 저자거리를 떠올려보라. 참형 전 연설의 순간은 항상 구경꾼들로 인산인해였고, 이유를 막론하고 그 사실을 각 개인의 렌즈로 머리 깊숙이 잔상을 남겨둔다. 잔상은 개인의 일생 내내 깊은 무의식 속에서 숨겨져 의식의 투명한 주권행사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공동의식체로서 집단적인 모럴moral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런 듯 하다. 아마도 삼일만세운동을 떠올려보라.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씨를 말려야 하는 교훈으로써, 또 누군가에게는 민족 대대로 불리워질 혁명으로서 상이한 범주에서 몇 세대를 지나 다른 층위로 탈주하며 기록만이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측면을 상상해보자. 아마 영화 ‘매트릭스’는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고… .
매트릭스 내에서 주인공 네오가 도망칠 때, 요원들은 네오를 목격한 사람의 시각정보에 접속하여 추격하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지금과 똑같지 않은가?SNS 시대. 모두가 구경꾼으로서 엄지를 위로 아래로 결정하며 크고 작은 배심에 참여하고 있다.바닥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시간을 할애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바톤 터치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때 누군가가 총대를 대신 매었다. 구경꾼은 다시 일상의 속도를 찾고 공간의 긴장감은 일시에 누그러지며 갈 길을 재촉했다. 나는 후배의 눈빛을 교신하고, 그들과 함께 느리게 내려갔다.
선명했던 풍경은 추억록 어딘가에 끼어지고, 그 일은 무의식 어딘가로 흩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