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12 꿈
이 꿈은 아들의 장소와 나의 장소, 아들과 내가 서로 중첩되어 나온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주 생생히 보여준다.
첫째 아들이 서울에서 친구랑 놀다가 학교 근처 자취방에 왔다. 나는 어릴 때 마루가 있고, 불을 지펴서 밥을 짓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의 집 안방에 있다. 안방과 부엌이 붙어있는 벽 사이에 작은 문이 있다. 그 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자 아들이 그곳이 자기 방인 것처럼 자연스레 부엌 바닥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려고 누워있다. 아들의 자취방이면서 부엌 바닥이다.
내가 아들에게 잘 놀다 왔냐고 물어본다. 친구도 자기 집에 놀러 오기로 했는데, 이불이 없어 안된다 했다고 한다. 내가 친구 이불을 줄 테니 친구에게 놀러 오라 하라고 아들에게 말한다.
방 안에는 아들이 가지고 온 토종밤인 동글동글하고 자그마한, 껍질을 깐 생밤 세 알이 있다. 그중 하나를 먹기 위해 밤을 씻으러 부엌으로 간다. 부엌으로 가기 위해 마루로 나온다. 마루 위에는 아들이 가지고 온 빨래 더미가 쌓여있고, 마루를 내려오면 있는 섬돌 위에 우리 식구 빨래가 쌓여 있다. 빨래가 많아 부담스럽기도 하고, 지금은 너무 늦어 내일 저 빨래들을 다 빨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부엌 바닥에 자고 있는 아들을 보니 바닥의 찬기운이 몸으로 스며들까 걱정되어 이불을 깔고 자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고 갑자기 어?, 아들이 왜 부엌에서 자고 있지?라는 의문이 문득 든다. 아들을 깨우며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아들이 놀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 자취방과 내 어린 시절 집, 즉 아들의 공간과 내 공간이 겹친다. 아들은 나의 정서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의 정서환경은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 장소가 부엌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부엌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장소, 돌봄, 불이 있어 에너지가 생성되는 장소이다. 이 장소는 현재의 부엌이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부엌이며, 내 심리적 공간이다. 뻐꾸기의 알을 품기로 했듯이 이제 꿈은 좀 더 노골적으로 아들이 돌봄을 받기 위해 내 품으로 들어온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다 큰 아들을 돌본다는 의미는 존중해 주는 것이다. 나의 불안으로 인해, 그동안 너의 선택보다 부모의 조언이 더 현실적이고 어쩌고 하면서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다. 아들이 한 번 던져 보는 말에도 내 안에서는 자동으로 파르르 떨리는 방어막이 자동 형성된다. 이런 나의 태도로 인해 아들의 의욕을 모두 꺾었다.
학교에 입학했으면서도 진로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할 때,
"네가 좋다면 한 번 해봐"
생활태도나 방 청소에 대해서도
"너의 공간에는 침범하지 않을게."
이런 현실에서의 변화가 꿈에 반영된 것일까? 아들이 나의 돌봄 공간으로 들어온 것은, 내가 비로소 '제대로 된 돌봄'을 시작했다는 무의식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이 부엌 공간에는 두 사람이 겹쳐 있다.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 '나'와, 그 나를 투사했던 '첫째 아들'. 이불을 뒤집어쓴 아들의 모습에서 그 나이 때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지독한 고립감과 외로움. 심리적으로 모든 것이 차단된 듯한 기분. 그렇게 숨고 드러눕고 싶은 마음. 컵 하나 씻는 것조차 힘들었던 때이다. 이 시절의 나는 더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나이며, 그 아이를 돌봐야 아들과 나를 자꾸 동일시로 보는 것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 아들은 친구집에 종종 놀러 간다. 하지만 친구를 자취방으로 데려오지는 않는다고 한다. 꿈에서 이유는 친구에게 줄 이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불은 몸을 따듯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친구에게 되돌려 줄 에너지가 아직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동안 나의 양육방식 스타일이 바로 나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즉각적인 해결을 제시한다.
"네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내가 대신해 줄게."
이것이 바로 그림자다. 아들의 부족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내면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아들을 내 어린 시절의 나로 착각하고 그렇게 대해왔다. 아들이 아무 말이 없자 곧바로 장면이 바뀐다.
밤은 씨앗이면서 과일이다. 영양소도 아주 풍부하다. 아들이 먹기 편하게 껍질을 깐 밤을 준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3가지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아이들을 더 잘 키울 수 있었다는 죄책감을 벗어버리는 일.
둘째, 부엌 바닥이 아니라 방 안으로 아들(나)을 들여 따듯하게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셋째, 빨래를 구분하듯 나와 아들의 적당한 경계를 짓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
세 알의 밤은 마치 치료제 같다. 한꺼번에 모두 먹으려 하지 않고, 어느 것을 먼저 먹을까 신중히 골르며, 씻기 위해 부엌으로 가져간다. 깨끗하게 먼지를 닦아 감사히 잘 먹으려는 것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빨래. 내가 가족관계에서 정리해야 하는 감정의 잔여물들이다. 아들이 가지고 온 빨래. 다른 빨래와 같이 두지 않고 마루 위에 올려놓는다. 나를 먼저 돌봐 달라는 신호처럼.
부엌으로 들어서자 시멘트 바닥에서 아들몸속으로 스며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자, 마치 내 몸으로 침투하는 것처럼 몸이 떨린다. 몸의 냉기는 어린 시절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무의식에 자리 잡은 차가운 심리적 냉기이다. 또한 부엌에 자리를 잡고 자는 모습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자리인 부엌데기, '콩쥐와 팥쥐'에서 콩쥐같은 나를 연상시킨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아들이 방이 아니라 부엌이라는 적절치 못한 장소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자각이 드는 순간 아들은 '나'라는 느낌도 같이 따라왔다. 비로소, 이제야 내 심리적 위치를 발견했다. 그 심리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함께.
마지막에 아들을 깨우며 방으로 들어가자고 말하지만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이 없어 아쉽다.
그래서 꿈에 더 이어서 상상해 본다. 비몽사몽 한 아들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아랫목이 따듯한 방안에 눕혀 이불을 덮여주고 푹 잘 수 있게 난 비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