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선악 대결이 아닌 관계의 균열과 회복
최근 K-드라마의 성취는 눈부시다. 그 놀라움은 단순히 서구 콘텐츠를 모방하거나 학습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서구의 서사 문법을 흡수하면서도, 인간과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만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데 있다. K-드라마는 특히 ‘인간’과 ‘관계’에 집요하게 집중한다. 아무리 장르적 쾌감이 극대화된 작품이라도, 그 중심에는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거나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탐구하는 서사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자연스레 서구의 콘텐츠와 대비된다.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서구 드라마는 주로 ‘히어로’와 ‘시스템’, 혹은 ‘거대한 도전’을 통해 세계를 구하거나 악을 응징하는 이야기 구조를 따른다. 그들이 그리는 빌런은 종종 ‘절대 악’으로 규정되고, 주인공은 그 악을 응징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한다.
이처럼 K-드라마는 선악의 절대 구도보다 관계의 균열과 회복, 그리고 감정의 윤리를 중심에 둔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이 서사적 감수성은 단순한 드라마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 이어온 문명적 유산의 흔적이며, 그 바탕에는 조선 500년을 지탱한 사상, ‘유교’의 인간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유교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며, 교육과 수양을 통해 누구나 군자 될 수 있다”는 이 믿음은 500년 이상 이 땅의 통치 이념이자 사회의 근간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국가의 이념이자 교육의 목표로 작용한 성선설은 제도적 교화를 넘어 일상적 사고방식으로 스며들었다. 그 결과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이 한국 사회의 기본값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가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조차, 그 잘못 자체는 비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본래 악한 존재’로 규정하는 데 주저한다. “저 사람은 본래 선한데, 실수를 했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한다.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 안으로 품으려는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정서가 응축된 말이 바로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이해의 언어다.
이러한 K-드라마의 특징은 서구 콘텐츠와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서구 드라마, 특히 헐리우드 콘텐츠는 ‘히어로’, 즉 영웅적 주인공에 집착한다. 그건 그들 문명의 기저에 자리한 기독교의 원죄 사상,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성악설적 관점 때문이다.
인간을 신뢰하기 어려운 세계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의 수양’보다는 명확한 ‘규칙’과 그에 따른 ‘시스템'이 강조된다. 또한 인간 스스로 선에 이를 수 없기에, 신의 은총을 입은 초월적 존재, 즉 ‘구원자’나 ‘히어로’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헐리우드의 빌런은 대부분 ‘악’ 그 자체로 묘사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응징은 시청자들에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신의 뜻으로 집행되는 응징이기에, 그 죽음에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동정심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성선설의 세계가 ‘회복’을 지향한다면, 성악설의 세계는 ‘응징’과 ‘정의’를 지향한다.
이 두 철학적 관점의 차이는 각 문명이 겪어온 공동체의 역사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오랜 세월 평화롭게 비교적 동질적인 공동체를 이루어왔다. 이러한 환경은 타인을 ‘외부인’이나 ‘적’으로 보기보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의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시각을 강화했다. 따라서 구성원의 일탈을 ‘배제’가 아닌 ‘교화’와 ‘용서’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가 형성되었다.
반면 서양의 역사는 이질적인 집단과의 만남과 충돌이 일상이었다. 로마 제국의 광활한 영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그리고 수많은 왕국 간의 전쟁은 끊임없는 타자와의 조우를 낳았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우리’와 ‘그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인간을 쉽게 타자화하고,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경향이 발달했다. 일단 ‘타자’로 분류된 존재에게는 성선설적 연민이 끼어들 여지가 줄어든다. 그는 ‘교화할 우리’가 아니라 ‘응징할 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은 왜 다른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유교적 유산이 결정적이라면, 중국 드라마 역시 K-드라마처럼 인간의 내면과 관계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컨텐츠가 K-드라마만큼 관계에 집착하진 않는다.
유교의 본고장이었던 중국에서 맹자의 성선설은 ‘기본값’이 아니었다. 중국 사상사에서 맹자의 성선설은 순자의 성악설과 끊임없이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고 보고, 강력한 ‘예(禮)’와 ‘법(法)’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법가 사상으로 이어져 강력한 통일 제국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이 도덕적 교화를 사회 운영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면, 중국은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 구조 속에서 현실적 통치를 우선시했다. 그 결과 맹자의 성선설은 이상으로 존중되었으나, 실제 정치와 제도에서는 순자와 법가의 논리가 반복적으로 복권되었다.
이와 달리 조선은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철학을 국가 통치의 중심에 놓고 500년간 유지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신념은 제도와 도덕, 그리고 인간관계의 근간이 되었고, 이러한 유산이 오늘날 K-드라마의 정서적 토양을 이룬 것이다.
한류를 이끄는 K-드라마의 독보적 강점은 ‘인간’ 그 자체를 향한 깊이 있는 탐구에 있다. 한국만큼 한 사람의 복잡한 내면과 그가 맺는 관계의 역학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는 드물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K-드라마가 세계를 사로잡는 핵심 비결이다. 초월적 신의 구원이나 냉철한 정의보다, 모자라고 흔들리더라도 끝내 서로에게서 선함을 발견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이야기가 훨씬 더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
오늘날 K-드라마의 성취는 물론 창작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탁월한 예술적 감각의 결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어깨를 떠받치는 거대한 정신적 유산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에게 500년 넘게 “사람은 본래 선하며, 교육과 수양을 통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온 성선설의 철학이 사회적 기본값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며 최악의 악인에게서조차 인간적인 사정을 헤아려보려는 정서적 유산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서사를 만들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K-드라마의 눈부신 성공의 결정적 원인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체화해온 정서적 유산, 곧 인간을 믿고 관계를 중시하는 문명적 감수성에 있다. 이 유산은 오늘의 창작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토대다. 우리가 그 문명적 토대를 자각할 때, 한국 콘텐츠는 더 깊이 있고 지속적인 힘을 얻게 된다. 토대를 모르거나 서구의 장학생 정도로 오해한다면 k-드라마의 힘은 이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