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제사가 필요한 이유

제사는 미신이 아니다

by 김욱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제사는 귀신 밥 먹이는 미신쯤으로 여겨진다. “그걸 왜 해요?”, “죽은 사람이 와서 밥을 먹나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제사의 본래 의미를 오해한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제사는 귀신을 다루는 의식이 아니다. 제사에서의 ‘조상’은 귀신이라기보다 ‘기운(氣)’이다.


유교의 생사관에 따르면 사람은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진다. 혼은 하늘의 기운이며, 백은 땅의 질료다. 사람이 죽으면 백은 흙으로 돌아가 소멸되고, 혼은 하늘로 흩어진다. 그 혼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이 약 4대, 즉 100여 년 정도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제사는 4대조까지만 모시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물론 현대 과학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죽음을 초월적 현상으로 이해하던 전근대 시대의 인식 체계 속에서 본다면, 유교의 생사관은 가장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영원한 천국이나 윤회의 고리를 설정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기운의 흐름’으로 이해한 사유는 이미 근대적이었다. 유교는 죽음을 신비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유한성을 자연 질서 속에 위치시켰다. 제사는 그 질서에 대한 경외와 기억의 표현이었다.


제사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이다. 한 걸음만 물러나 세계를 둘러보면, 인류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삶에는 수많은 종교 의례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잉글랜드는 명목상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국왕이 그 교회의 최고 수장이다. 미국은 헌법상 정교분리를 내세우지만, 대통령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국민의 다수가 매주 교회에 간다. 정치인들은 “God bless America”를 외치며 유권자와 신앙을 공유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아침마다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 ‘짜낭사리’를 정성껏 만들며 하루를 시작하고,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과다. 인도는 힌두교가 여전히 생활 전반을 지배한다.


그에 비해 한국의 제사는 얼마나 세속적인가. 제사는 1년에 몇 번, 그것도 가정 단위에서만 행해진다. 특정 신을 섬기지도 않고, 제사 음식은 신비적 의미보다 ‘공경과 기억’의 표현에 가깝다. 종교적 색채로 본다면, 한국의 제사는 오히려 전 세계에서 가장 ‘간결하고 인간적인’ 의례라 할 수 있다.


물론 의례가 주는 불편함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세대를 통합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강력한 순기능이 있다. 매주 같은 성가를 부르고 같은 경전을 읽으며 유대감을 확인하는 기독교 공동체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은 의례는 개인을 넘어 사회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유교의 낮은 종교성으로 인해 전통 의례들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세대가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문화적 자산을 잃어가고 있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손주 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같은 경험을 나누고 공통의 기억을 쌓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사마저 사라진다면, 한국 사회는 세대 간을 이어주는 ‘공동 의례’를 잃게 된다. 제사는 단순히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고,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윗대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생명의 흐름 속에서 내가 존재함을 자각하게 하는 의식이다. 인간은 추모를 통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깨닫는다. 그 자각이 사라질 때 세대는 고립되고, 문명은 지속성을 잃는다.


우리는 좋든 싫든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며 유교적 틀 안에서 사유하고 관계를 맺어왔다. 효와 예를 중시하는 가족 문화, 스승을 공경하고 어른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공동체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가치관, 이것들이 제사로 대표되는 유교 의례를 통해 세대를 거쳐 학습되고 전승되어 왔다. 이제 와서 제사를 ‘전근대적’이라며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문화적 DNA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의례의 동물이다. 의례가 없으면 집단도 없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제사를 불편해한다. 음식 장만이 힘들고, 형식이 복잡하며, 남녀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비판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곧 ‘불필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의례는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전제한다. 편리함은 지속을 낳지 못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반복하는 의례가 세대를 연결하고 문화를 형성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제사의 복원’이 아니라 ‘제사의 재해석’이다. 새로운 세대가 제사를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조상에 대한 감사, 세대 간의 기억의 공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겸허함 같은 정신은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 형식은 간소화하더라도 의미는 강화할 수 있다. 피자나 치킨을 올리든, 제문 대신 편지를 낭독하든, 사진 한 장 앞에 절을 하든, 그 방식이 어떻든 제사의 의례는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제사를 이어가는 것은 단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다. 그것은 신을 섬기기 위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고 세대를 잇는 방법이다. 우리가 제사를 잃는다면, 그것은 조상을 잊는 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문명 감각을 잃는 일이다. 새로운 세대가 이 의례를 단순한 ‘옛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로 받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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